A30. 여동생과의 고삐풀린 뇌생략 대화
매달 첫 번째 일요일 아침 저는 미국에 있는 동생과 온라인으로 얼굴을 마주합니다. 동생이 미국에서 산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억지로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만날 수 없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생의 얼굴을 마주하면 거추장스러운 체면과 의식의 장벽이 스르르 무력화됩니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몸 안에서 직접 나오는 느낌입니다. 대체로 논리가 없고 엉뚱한 곳에서 웃음과 눈물이 터지지만, 그 언제보다 진실한 말들이 푸닥거리처럼 쏟아집니다.
한창 질풍노도의 사회 초년생 시절에 저는 동생과 둘이 서울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동생은 야근이 잦았고, 저는 직장과 대학원을 병행하며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를 외치던 때였습니다. 방 하나 거실 겸 부엌, 욕실이 전부였던 집이었는데, 저는 책상에 올려진 컴퓨터 모니터로 ’명탐정 코난’이나 ‘CSI’를 보고 또 보곤 했습니다. 애니든 드라마든 사람 죽이는 것만 주구장창 봐댔으니, 그때의 저는 뭔가 울분이 가득했나 봅니다. 동생은 그런 저에게 ’ 뭘 봐도 좋으니 한국말하는 거’ 보라고 볼맨 소리를 했죠. ‘I am sorry but I can’t play the guitar.’ 밖에 못했던 동생이 지금은 미국에서 식당 2개를 하는 사장님으로 살고 있으니 인생은 참 모를 일입니다.
한 번은 둘 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들어와 자정이 다 되어 통닭을 시켰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빌라 1층에 있는 치킨집이었는데요. 우리가 시킨 것은 정확히는 ‘치킨+피자+파스타 세트’ 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런 무지막지한 걸 종종 시켜 먹곤 했어요. 스트레스를 받고 야근을 많이 할수록 차곡차곡 살이 찌고 있었죠. 그런 우리를 사장 아주머니는 걱정하고 계셨나 봅니다. “(팔아주는 건 좋지만…) 아가씨들, 이렇게 늦게 이거 다 먹으면 살쪄요.”하고 한 마디 하셨지요. 하하 뭐라고 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은 안 나지만 결국은 주문을 해서 뜨끔해하면서도 맛있게 먹어치웠죠. 맥주도 꿀꺽꿀꺽 마시고요.
그렇게 거하게 먹고 취한 다음날은 (대개 주말이었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차를 몰고 한강공원이나 과천대공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정말 고삐 풀린 ’ 뇌 생략 대화‘가 시작됩니다. 한번 뇌가 생략되기 시작하면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동생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줘요.
“아니 이걸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하는 거야.”
저는 얼빠져서 “그게 뭔데?” 하죠. 그럼 동생이 휘적휘적하면서 설명을 하는데 저는 여전히 잘 못 알아듣고요. “아 거기서 컨트롤 브이 컨트롤 엑스를 했다고? 그러면 안 됐던 거야?” 그럼 동생이 “그렇지 그렇지” 하고 제가 또 “근데 컨트롤 브이 엑스는 왜 그렇게 불러?” 하면, 동생이 ”아 몰라~ 그건 태곳적부터 컨트롤 브이 컨트롤 엑스야~~“ 하고 소리치는 거지요. 이렇게 들으면 안 웃길지 몰라도 그때 저랑 동생은 혼이 쏙 빠지게 웃곤 했습니다. 뇌 어딘가의 빗장을 철컥하고 벗겨 놨었나 봐요. 그렇게 웃고 나면 또 다음날들을 달릴 수 있었고요.
저는 제 여동생을 사랑합니다.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여기저기 난 구멍을 뚫고 지나가듯이, 거기에 담쟁이가 타고 들어와 꽃을 피우듯이, 그녀와 제 영혼도 그렇게 엉켜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영혼의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여동생이 있어서(저 또한 그녀의 풀린 고삐가 되어준다고 확신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누구의 눈치 안 보고 맘껏 뛰놀 수 있는 서로의 안전지대가 되어줍니다. 게다가 뇌 생략 대화를 하다 보면 대부분이 작당모의로 끝날 때가 많아서, 그것도 취향저격이지요. 그녀가 있어 주어서, 이 세상에 감사합니다. 만수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