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덜 생산하고 덜 발전하시오"라고 한다면?
혼자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나혼자산다(나혼산)‘를 즐겨봅니다. 출연자들이 몇년째 MBC 연예대상을 휩쓸고 있는 것을 보면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공감하며 본다는 얘기겠지요. 결혼도 않고 아이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 끈끈한 공동체가 되어주는 모습에서 위로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나혼산 출연자들 중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맥시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남의 시선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세계를 정성스럽게 구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무지개’라는 이름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점점 작아지는 가족 이외에 속할 곳을 찾는 현대인들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나혼산의 우정공동체는 2300년 전 지중해에서 인기를 얻었던 스토아 철학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제국의 체계속에서 혼란스러운 개인들이 내면의 안녕을 추구하고 우정공동체에 의지했던 것이 스토아 철학이거든요.
현대사회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나요?
한쪽을 보면 영토 전쟁에 여념이 없고, 생산과 소비, 그리고 이를 떠받치는 화폐는 한계 없이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혹은 그럴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확장의 세계라고 부르겠습니다.
또 한쪽을 보면 이러다가 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사회, 경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지나친 탐욕을 버리고 천천히 느리게 살기, 미니멀리즘 등이 그것입니다. 그림자의 세계라고 부를게요. 2300년 전 스토아 철학이 추구했던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해 온 국제개발협력과 기후변화는 그림자의 세계에 좀 더 가까울 겁니다. 독자적인 담론을 가지지 못하고 확장의 세계 규칙 속에서 소소한 반격을 꿈꿉니다. 하지만 큰 틀이 바뀌지 않는 한(paradigm shift), 반격의 성과가 쌓이지를 않습니다.
스토아 철학이 등장한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큰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서로 만나고 융합되었으며, 전통적인 가치와 신념 시스템이 도전받았습니다. 세계가 연결되고, 제국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흔들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개인이 마주한 불확실성과 변화에 대응하며 발전했습니다. 이 철학은 개인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외부 사건에 대해 무관심할 것과 내면의 덕을 추구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작은 우정공동체를 이루어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권하죠.
현대사회를 살펴보면 2천 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19세기 무렵 시작된 전 지구적 연결은 '항해'와 '화석연료'를 꺼내 쓰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들이 추가되었고, 전쟁은 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이끌었지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1990년대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냉전의 종식, 2000년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세계화, 기술의 급속한 발전,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속에, 개인과 사회는 스트레스, 불안정, 그리고 불확실성이라는 압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속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던 것보다 훨씬 더.
스토아 철학이 제공하는 내면의 평화와 자기 통제, 우정공동체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스토아 철학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자신의 욕구를 통제함으로써 내면의 평화를 달성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무관심과 정신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생각과 행동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원칙은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미니멀리즘 생활 방식의 추구로 연결됩니다. 즉,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만족을 얻으려는 노력 해야 한다고 말하죠.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되어 로마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세상이 너무 변화무쌍해서, 개인의 안위와 행복이 큰 제국의 정치나 사회경제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개인들이 찾은 돌파구였습니다. “개인이 외부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통제함으로써 내면의 평화와 자유를 달성할 수 있다”면, 불확실한 시대에 개인의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일 수 있겠지요.
2015년 이후 국제개발협력의 바이블로 기능하고 있는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는 빈곤 종식, 기후 변화 대응, 보건과 교육의 질 향상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2030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들을 정해 놓았습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하고,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에너지 효율성 제고, 자원 재활용, 생태 다양성 보호, 지역 사회 참여 등의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가능개발목표는 여전히 “개발”이라는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더 생산하고, 더 소비하고, 더 발전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 아래, 탈개발이나 미니멀리즘과 같은 철학적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듧니다. 누구에게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주문이고, 누구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을 포기하라는 주문이니까요.
예를 들어, 과소비를 줄이고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소비함으로써 탄소발자국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육식을 덜하고, (심지어) 아이를 덜 낳는 것으로 지속가능한 미래에 기여할 수 있겠지요. 선진국에 살고 있는 개인 중 소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를 최소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어느 최빈국에 가서 한다면, "당신은 나와 내 가족, 심지어 내 이웃 중의 누구라도 고기를 먹은 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한 달에 한번 먹는 고기가 기후변화의 원인이라는 것인가? 당신은 우리 동네에 대중교통이 얼마나 드문드문 오는지 아는가?"라는 반문에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또한 지속가능개발은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개인과 작은 공동체 수준에서의 변화에 중점을 둔 스토아 철학의 역할이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 정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씨알이 안 먹힐 거예요. 어느 기업에게 “덜 생산하시오”, 어느 나라에게 “덜 발전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알겠죠.
사회의 수준으로까지 물질적 절제와 내면의 평화를 확산시키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철학이 필요할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다음 편에서 이어서 탐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