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사고실험, 일곱 번째
올해 5월 회기가 시작된 22대 국회를 보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할지 말지와 같은 기본적인 논의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신재생 확대를 위해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시 국회 동의를 의무화하고 탄소중립산업법을 발의하려 합니다. 국민의 힘은 원전 확대로 신재생이나 탄소중립으로의 전환을 늦추려고 하죠. 기본소득당이나 사회민주당은 각각 원전으로 인한 환경문제, 기후변화로 인한 사회적 정의에 초첨을 맞춥니다.
사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기후변화가 중요한 정치의제가 되었지만, 아직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그리고 많은 개도국 정치에서 기후변화가 핵심 의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심화되어 가는 미래에도 여전히 그럴까요? 지금부터 상상해 볼 기후변화가 불러올 전 세계의 질서와 정치 체제 변화는 조엘 웨인라이트(Joel Wainwright)와 제프 만(Geoff Mann)의 책 "기후 리바이어던 (Climate Leviathan)"에서 제시한 시나리오를 참고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괴물,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는 성경과 철학에서 유래했으며, 각각 강력한 국가 권력과 무질서를 상징합니다.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성경에서 바다 괴물로 묘사되며, 강력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그려져요. 이 개념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에 의해 국가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발전되었습니다.
반면, 베헤모스(Behemoth)는 성경에 등장하는 육지 괴물로,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합니다. 베헤모스는 리바이어던과 대비되는 존재로, 질서와 규율이 아닌 혼돈과 파괴를 대변합니다. 웨인라이트와 만은 이 두 개념을 기후변화 시대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책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가능한 미래 정치 체제를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 분석합니다. 첫 번째 축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통치권력이 있느냐(세계 정부가 있느냐), 즉 세계주의(Globalism)와 국가주의(Nationalism)입니다. 두 번째 축은 자본주의의 채택 유무로, 자본주의(Capitalism)와 사회주의(Socialism & Beyond)를 나눕니다. 이 두 축을 조합하면 네 가지 시나리오가 도출되지요.
1. 기후 리바이어던 (Climate Leviathan): 자본주의를 추구하되, 지구 행성 수준의 주권체제를 구축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웨인라이트는 이 시나리오가 가장 우세할 것으로 전망하며, 파리 협약과 같은 글로벌 기후 협정이 이러한 체제의 초기 형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죠. 파리협약이 있으나 마나 국가들을 강제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2. 기후 베헤모스 (Climate Behemoth):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도 국가 이익과 주권을 강화하는 시나리오로, 각국의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입장과 일치합니다. 사실, 국가들이 국익에 따라 기후변화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 시나리오는 기후 리바이어던의 현실화를 막는 주요 장애물입니다.
3. 기후 마오 (Climate Mao): 사회주의 기반의 기후 체제로,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국가 혹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중국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4. 기후 엑스 (Climate X): 그레타 툰베리와 같은 기후 활동가들을 위시한 풀뿌리 기후 민주주의와 같은 이상적인 체제를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세계 국가도 없고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어떤 것, X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는 과연 내 생에 기후 리바이어던이 도래하는 것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은 전 세계적인 통치 체제를 의미하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정 및 사법 집행력이 갖춰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국제기구들은 단순히 서비스 제공자에 불과한데, 규범을 강제할 수 있는 행성 단위의 실질적 권력이... 가능할까요? 국제기구들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 즉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행성 단위의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 가능할까 싶은 거죠.
하지만 만약 기후 베헤모스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국가주의가 강화되고,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심화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전 대통령 트럼프죠). 이 경우, 국제 협력보다는 국가 간의 갈등과 경쟁이 심화되고, 기후변화에 대한 글로벌 협력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기후변화 해결책은 국가 내부 수준으로 축소될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국제정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후변화 관련 조치를 강제하는 분위기라면 그에 따라가고, 국가별로 제멋대로 해도 손대지 않는 분위기가 되면 최대한 대응을 늦추려고 하지 않을까요.
기후 베헤모스가 현실화된다면, 또 다른 선택지가 머릿속을 스칩니다. 포기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 대응이 무력해진다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소박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하지만 그것이 또한 기후 X의 서막이 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후변화 시대의 정치는 이미 도래해 있습니다. 파리협약과 같은 기후 리바이어던의 모습도 있고, 트럼프 같은 기후 베헤모스의 모습도 있지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좀 더 깊이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상상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테니까요.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