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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Apr 28. 2019

주민으로서의 나날

포르투


오전 11시 30분.

눈을 뜨면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고 도시엔 활기가 가득해.

포르투에 지내는 나의 하루는 매일같이 평화로웠어.




우리는 나들이를 하는 날이면 옷을 맞춰 입었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에는 힐가든으로 소풍을 갔어.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핑고 도세에서 사 온 초록색 봉지의 감자칩과 포트와인을 꺼냈어.

참, 오렌지도 빼놓을 수 없지.

갈매기 우는 소리가 베이스가 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면 노랫말이 되었어.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배경음악 삼아 와인을 마셨어.

낮술은 애미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다행이었지.

엄마 아빠는 한국에 계시니 말이야.

사실, 매일매일 취해있었어.

이 도시에서 취하지 않고 버티는 건 꽤 힘든 일이거든.

풍경도, 와인도, 피부에 와 닿는 이 계절의 바람도 내가 취하게 도와줬지.

그랬다. 늘 취했다.
내가 본 하늘 중 포르투만큼 아름다운 하늘이 있을까.

낮부터 자리 잡고 앉아있다 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포르투의 유명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어.

온 하늘이 솜사탕 빛 연분홍이었다가 점차 진해지더니 어느 칵테일의 빨간색으로 변했어.

그러다가 빨간색 사이로 보랏빛이 섞여 들어 밤이 찾아 올 무렵이 되면 그가 나타났지.

카메라를 손에 쥐고 그날의 스냅 고객님과 함께.

그의 촬영은 늘 힐가든에서 끝이 났어.

마녀가 나올 것 같은 포르투의 야경을 배경으로 마지막 셔터를 누르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곤 했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그의 모습 중 하나야.

촬영이 끝난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었어.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알려준 날, 달력에서나 보던 풍경을 마주했다.
왼쪽부터 기마랑이스, 브라가의 봉 제수스

그의 하루가 바쁘지 않은 날에는 차를 타고 포르투 근교로 나들이를 갔어.

어떤 날은 기마랑이스로, 또 어떤 날은 브라가로, 어떤 날은 조금 더 멀리 코임브라로.

동양인이 잘 없는 동네에 그와 손을 잡고 거닐다 보면 우리를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곤 했어.

머리부터 발 끝까지도 아니야.

우리의 머리색을 보고 우리의 얼굴을 훔쳐봤지.

우리는 그걸 은근히 즐겼어.

스타가 된 기분이 들었거든.

포르투의 하루는 느리지만 한달은 빨리 간다.
빵 부스러기를 내 손에 쥐어주며 비둘기에게 주라고 하시던 할머니, 잠시 동화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온다더니 오지는 않고 마냥 화창한 날에는 포르투 도시를 거닐었어.

두 손을 맞잡고 말이야.

도우루 강이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샹그리아를 마시며 사람 구경을 하기도 했고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도 했어.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나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지.

가장 인상 깊은 거리의 공연은 포르투 플로레스 거리에 있는 두 부자였어.

아빠의 연주가 끝나면 아들의 연주가 이어지고 아들의 연주가 끝나면 아빠의 연주가 이어졌어.

아빠가 연주를 할 땐 아들은 옆에서 크레용을 손에 쥐고 그림을 그렸어.

그런 아들의 곁엔 꼬질꼬질한 닭 한 마리가 함께였지.

평생 잊지 못할 영화같았던 순간.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그리운 날에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어.

미리 만들어둔 반찬을 꺼내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와 메인 메뉴로 만든 고기 요리를 상 위에 올렸지.

밥은 혼자 먹으면 맛없고, 둘이 먹으면 맛있고, 여럿이 먹으면 신이 나더라.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는 친구들이 손에 쥐고 온 와인과 간식으로 와인파티를 이어나갔어.

보통 19도에서 20도인 포트 와인을 한 잔 정도 마시면 다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말이 많아졌지.

소리가 높아지고 흥에 겨운 밤.

그런 날 다음날이면 집주인으로부터 민원 메일이 와있었어.

포르투 주민들.

포르투 FC가 포르투갈 리그에서 우승한 날에는 주민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

거리엔 나팔부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축배를 드는 사람들, 포르투 FC의 팀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했어.

그 사람들 사이로 나와 그도 자연스레 섞였어.

동양인이, 아주 이질적인 느낌도 없이 말이야.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거리에서 술을 나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고 새벽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는 쉬는 날마다 나를 데리고 새로운 포토스팟을 찾아다녔다.

단조로운 듯 단조롭지 않은.

이질적이지만 사람 사는 냄새나는.

그런 나날을 살았어.


하지만 내가 포르투를, 유럽을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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