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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May 09. 2019

추억 쌓기

세비야

푸른 달 열닷새.

(5월 15일)

내가 잠시 그를 떠나야 하기 전에 우리는 추억을 조금 더 쌓기로 했어.

넣어 두었던 작은 보조 배낭을 꺼내 짐을 쌌어.

여벌 옷, 화장품, 세면도구.

아! 다이어리도 챙겨야지.

짐을 싸는 게 꽤 익숙해진 덕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어.

요령이 생겼달까?

스페인은 그와 나의 추억이 묻은 소중한 나라가 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스페인의 세비야였어.

지난번 야속한 날씨 때문에 건너뛰어야 했던 스페인 남부 여행을 그와 함께라니.

세비야는 그가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였어.

그는 나와 함께 세비야에 가보고 싶다 말했어.

“내가 좋아하는 도시를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

그는 평소 표현이 야박한 남자야.

표현을 잘하지 않는 그가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한 것만으로 가슴 한편이 가려워졌어.

그와 함께하는 일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점점 사랑받는 여자의 얼굴로 변해갔다.

이번 여행에는 두 명의 동행이 있었어.

한 명은 미래 언니야.

처음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친자매처럼이나 친해진 사람이지.

또 다른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완’이었어.

완이는 FC 포르투가 포르투갈 리그에서 우승한 날 거리에서 만나 함께 축배를 들었던 친구야.

수염이 나고, 머리는 늘 특이하게 묶고 다니고, 원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조금은 독특한.

“고마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완이는 술과 담배를 좋아하지만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이었어.

스페인 광장의 밤.

 나와 그는 그의 차를 타고, 미래언니는 비행기를 타고, 완이는 블라 블라카를 타고 각자 세비야로 향했어.

출발 시간도 도착 시간도 모두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은 조금은 특별한 여행이었지.

레게톤 음악을 BGM이 되고, 저물어가는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하늘색은 배경이 되었어.

포르투갈어로 표기되어 있는 표지판들은 어느덧 스페인어로 바뀌어 있었어.

구글 맵을 켜보니 포르투갈을 뒤로하고 스페인의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있었지.

가장 먼저 세비야에 도착한 건 나와 그였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스페인 광장은 밤에 가면 전세를 낼 수 있다.

5월 말, 스페인 남부인 세비야는 말도 안 되게 더웠어.

가만히 있어도 인중을 타고 땀이 흘렀고 짧고 얇은 옷들만을 입게 되는 날씨였어.

스페인 사람들이 가지는 ‘시에스타(낮잠)’ 시간이 이해되면서 우리 또한 낮에는 시에스타를 즐길 수밖에 없었어.

그와 나는 스페인 광장부터 세비야의 대로부터 골목길까지 거닐었어.

밤에는 완이가, 다음날로 넘어가는 새벽에는 미래언니가 도착했어.

우리가 만난 건 세비야의 한 클럽.

청춘이 모였으니 청춘을 즐겨야 하지 않겠어?

거리가 조용하더니 동네 젊은이들이 모두 여기 있더라고.

그 밤 왼쪽에 있던 별이 오른쪽으로 흐를 때까지 우리는 청춘을 불태웠어.

더운 날씨 덕분에 낮엔 죽은듯이 있다가 밤이 되면 살아났다.

새벽까지 놀았던 지난날의 후유증을 부여안고 프리워킹투어를 들으러 갔어.

도시 곳곳에 묻어 있는 이슬람의 흔적으로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거리가 눈에 들어왔어.

하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은 귀로 들어오지 않고 뜨거운 태양은 더 이상 걷지 못하도록 강하게 내리쬐였지.

우리 네 명은 중간에 도망을 쳤어.

그리고는 곧장 점심을 먹고 호스텔로 돌아가 시에스타를 즐겼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잖아.

스페인에 왔으니 스페인스럽게 여행을 해야지.

서울에서 부산가듯 떠난 여행. 우리는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떠났다. 클라스 보소.

해가 질 무렵 눈을 떴어.

호스텔의 에어컨 아래서 시에스타를 한껏 즐기고 숙소를 나섰어.

선선한 바람은 우리를 세비야 광장으로 데려다 놨어.

낮의 역동적인 풍경과는 반대로 정적만이 가득했어.

플라멩코를 추는 사람들, 산책을 즐기러 온 가족들, 인공 호수에서 노를 젓는 연인들.

모든 모양이 사라지고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이 고요히 가라앉아있었어.

그 가운데 서서 거니는 우리들.

청춘 드라마 치고는 꽤 멋들어진, 고져스한 장면이었어.

세비야의 밤은 낮보다 더 황금빛으로 빛났다.

“우뚝 솟은 탑의 개수는 꼭 40개,

그중 가장 높은 것은 층계를 50계단 올라가야 오를 수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 스페인 정복자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인 ‘세비야 대성당’은 이슬람 사원의 영향이 남아있었어.

웅장함에 놀란 눈과 화려함에 놀란 입이 연신 탄성을 쏟아냈어.

공중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묘, 탐스러운 오렌지가 가득한 오렌지 나무 정원, 그리고 히랄다 탑을 오르면 보이는 세비야의 전경은 잠시 내가 판타지 세계에 있는 착각이 들게 했어.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던 콜럼버스. 그의 유언대로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있지 않다.

시에스타를 즐기고 밤마다 파티를 즐겼던 세비야 여행.

여행은 끝이 나고 우리는 원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어.

미래언니는 비행기를 타러 가고, 완이는 세비야가 마음에 든다며 조금 더 머물기로 했어.

그와 나는 다시 소와 양들이 풀을 뜯는 풍경 속으로 차를 달렸어.

이른 저녁 우리는 포르투갈 포르투에 도착했어.

하지만 며칠 뒤 나는 다시 짐을 싸야 했어.


이번엔 잠시 내려놓았던 커다란 배낭을 꺼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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