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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May 12. 2019

홀로서기

카사블랑카, 마라케시

90일, 그리고 또 90일.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90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 90일.


연애를 시작하고 한창 좋을 시기에 솅겐조약이 나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았어.

그는 포르투갈 포르투에.

나는 솅겐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 어딘가로 떠나야 했어.

처음 그를 만난 날 그가 나에게 추천해준 루트대로 여행을 해보자 라고 생각했어.

나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어.


띠리리리리-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를 애써 무시했어.

하지만 어차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

미리 싸 둔 배낭을 앞 뒤로 메고 포르투 공항으로 갔어.

수화물을 부치고 씩씩한 척 탑승구로 들어갔어.

가기 싫은 마음에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릴까 봐 괜히 뒤돌아보지 않았어.

그에게 웃으면서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솅겐 일수가 조금 넘어서 떠나는 바람에 마음은 잔뜩 쫄아 있었어.

다시 포르투로 못 돌아오면 어떡하나, 벌금을 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가득했어.

八(여덟 팔) 자 모양이 된 눈썹으로 출국심사를 받으러 갔어.

긴장된 마음에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어.

“Bom dia!(좋은 아침!)

어느새 입에 익어버린 포르투갈어로 인사를 건네었어.

그러자 그들은 동양인이 건넨 포르투갈어에 기특했던 건지 반가웠던 건지 스탬프를 쾅! 찍어줬어.

[마라케시의 어느 숙소] 찌는 듯이 더운 날씨에 어서 빨리 해가지기를 기다렸다.

창문 너머 저 아래로 황토색의 휑한 땅이 보였어.

[아프리카]

아까는 긴장되던 마음이 그 순간엔 막막함으로 바뀌었어.

대자연으로 가득한 땅에 위험한 일들 또한 가득하다고 들었기 때문일까.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 겁이 나기 시작했어.

동시에 여행가인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은 욕심도 났어.

검은 대륙을 즐겨보리라 다짐했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공항에 도착했어.

미리 공부해둔 아랍어로 인사를 했어.

“السلام عليكم 앗살라말레이쿰!(안녕하세요!)”

그러자 무섭게 보이던 사람들이 하얀 치아를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해줬어.

홀로 시작된 여행에 마음이 붕붕 뛰었어.

[하산 2세 모스크] 어쩐 일인지 이날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하산 2세 모스크] 순수한 아이들은 내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기차표를 구매하고 기차에 올랐어.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앞뒤로 맨 배낭을 멘 채로 자리에 앉았어.

낡은 기차 안에는 먼지로 가득했고 퀴퀴한 냄새가 기차 칸을 메웠어.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었어.


호텔이라고 적힌 허름한 숙소.

말이 호텔이지 먼지와 거미줄이 쳐져있고,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후진 곳이었어.

짐을 풀고 베드 버그는 없는지 침대와 천장 모서리를 살펴야 했고 창문을 열지도, 커튼을 걷지도 못했어.

동양인 여자 혼자 묵는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어.

늦은 밤 자려고 누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누군가 계속 문을 두드렸어.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있으니 남자의 웃는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어.

겁에 잔뜩 질려 울면서 그에게 전화를 했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고.

너무 무섭다고.

[바히야 궁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5천원 주고 산 바지. 이곳 모로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마라케시로 이동했어.

기차역을 둘러보니 나처럼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많이 보였어.

자유로워 보이는 그들처럼 나도 다른 여행자 눈에 그리 보일까 하는 마음에 어깨가 으쓱해졌어.

고파오는 배를, 아니 보조가방을 끌어안고 바삐 발을 움직였어.

택시를 잡아 타려는데 여기도 저기도 나를 똥으로 보나 사기를 치려고 안달이 나있었어.

“아 유 크레이지?”

소리를 듣고서야 만족스럽게 가격 흥정을 마쳤어.

털털 거리는 엔진 소리, 스프링이 보이는 의자, 떼었다 붙였다 하는 기어, 반밖에 안 닫히는 창문.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택시에 올랐어.


모로코는 메디나라는 미로 같은 시장이 유명한데 하필 내 숙소도 메디나 안쪽에 있었어.

앞 뒤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을 헤매었어.

길을 알려줄까 하는 낯선 이들을 믿어선 안된다고 들었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 노력했어.

어찌어찌 도착한 숙소를 보고 내 입에서는 탄식이 나왔어.

“아니 씨발. 이런데 있는걸 어떻게 찾아...”

어떤 숙소든 옥상에 쉴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옥상은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혼자 다니다 보면 캣 콜링을 하는 남자들이 수두룩 빽빽해서 주로 숙소의 친구들과 함께 다니곤 했어.

미국, 멕시코,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함께 다니니 확실히 캣 콜링을 안 하더라고.

마라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기 전에 잠시 거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어.

하지만 알고 보면 알록달록 타일로 장식된 궁궐과 코발트블루로 꾸며진 정원 등 볼 것이 많았어.

외국 친구들과 함께 다니다 보면 캣 콜링을 덜하는 것보다도 한국인들은 모르는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어.

[바히야 궁전] 나의 민낯이 쑥쓰럽던 시절. 머지않아 민낯이 가장 나다운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엉엉 울어버린 탓에 그가 걱정이 많았나 봐.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 시간을 내 내가 있는 마라케시로 오겠다고 했어.

그와 함께 갈 메르주가행 버스 티켓을 사고 공항으로 마중을 갔어.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몹시 설레고 떨리고 사기를 당해도 웃음이 나는 그런 날이었지.

도착 인포메이션에 그가 탄 비행기 편명이 떴어.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이 늦어지는지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지.

한 시간 하고도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배낭을 멘 그의 모습이 보였어.


그를 떠난 지 정확히 10일 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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