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여든이 넘어 가는 시간에 들어 가면서 부모님 지인분 장례식에 모시고 가는 일이 가끔 있다.
나도 잘 아시는 분인데 코비드 기간도 잘 넘기고 나서 안타갑게 부고를 들었다.
우리 식구가 미국에 온 몇해 전에 이민 오셔서 자리도 잡고, 교회도 같이 다니시고, 자녀 분들도 내 나이여서 자주 뵈었었다. 다들 비슷한 이유와 시기에 이민들을 오신다, 우리 부모님 포함 하여서. - "자녀 교육"
지금 내가 그때 부모님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보면 인생에 있어서 부부가 같이 합심하여 대단한 결정을, 그리고 행동으로 용감하게 옮기신 거다.
사십에서 오십. 중학교 내지는 고등학교 자녀들 한국에서 미국으로. 요즘에는 휴가 여행지 마저 미리 사진은 물론, 모든 사전 정보 챙겨서 가지만 인터넷도 없었던 80년대 말, 말 안 통하는 생소한 문화에, 태평양 건너 나라로 ‘무작정 상경’수준인데 다들 하셨다.
2023년 지금 내가 과연 내 딸에 교육이나 미래를 위해 직장, 거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옮겨 갈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이 했던 것 처럼, 만약에, 내가 조금 고등학교때 배운 독일어로, 독일로 가자고 와이프에게 얘기하고 합심해서 커다란 이민 가방 몇개들고 독일로 이사 가서, 처음 해보는 새로운 자영업 시작한다?? 감히 와이프에게 얘기도 못 꺼내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단한 결단과 어마 어마한 행동들이셨다.
장례식에는 부모님과 같이 세탁소 하시던 분들과 교회 어른들과 아주 오랫만에 인사들 드렸다.
Memento Mori
돌아가신 아저씨. 그리고 가족들. 장례식에 오면 고인에 인생을 한자리에서 돌아 보며 주의에 남아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겸허 해진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한참 일하실때 사진들이 티비에서 장면 장면 slide show로 돌아간다. 배경은 같은 세탁소 사진들인데 한번 돌아 가는 다음 장면마다 십년씩 건너 뛰어 이민초기에 초등학교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되고, 사회인이 되고, 그 아이가 가족이 생기고.일이분 사이에 이민 오신 수고가 모두에게 총정리되는. 엄숙한 분위기에 큰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다.
세탁소 같은 자리에서 삼십년 하신거다. 한장 한장 바뀌는 기운찬 한참에 마흔대, 오십대, 예순, 일흔,,, 웃는 아저씨 사진들 뒤에는 얼마 많은 피곤함과 땀 흘리는 치열한 나날들이 있었을까.
아주머니에게 깊은 위로에 인사를 드렸다. 고마워 하시면서 저편에 있던 중년 아줌아를 불렀다. "야 이리와바, 종범이 하고 어머니 오셨다." 결혼 후 오랫만에 보는 성희는 이제 마흔 중반에 지긋한 모습속에 중고등학교때 모습이 같이 보였다.
"우리 성희 알지? 콜롬비아 바이올~로지 전공 장학금 받고 간"
성희는 공부를 참 잘했다. 우리 가족이 소개 받아 나가기 시작한 한국 교회가면 이미 고등학교 졸업 뒤에 온 나는 어른 축에 들기에는 어린 18살이었지만 아무래도 영어로 예배 드리는 교포 애들 중고등부 보다는 어른 들과 같은 예배 시간에 참석하면서, 성희는 중고등부에서 교포 아이들과 영어로 재미있게 떠들고 영어로 웃고 다니는 것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아이비리그 명문 콜롬비아 입학은 교회 모든 학부모님들에 부러움을 한순간에 샀다.
그것도 전액 장학금에. 고등학교 졸업식 있기 전 부터 미리 아주머니는 딸 이름이 길어 졌다. "콜롬비아 바이올리지 전공 우리 성희"
우리 어머니도 "콜롬비아 성희" 라고 불렀는데 나는 뉴저지 주립 대학 조건부 입학을 위해 받아 오라던 TOEFL 성적에 , 외국인을 위한 영어 강의 시간 (ESL) 에 영어 듣는거 반, 대충 추측으로 이해 반으로 하고 있을때, 너도 좀 어떻게 좋은 이름에 대학을 목표에 두라고 저녁 밥상 마다 "콜롬비아 성희" 처럼.. 이야기를 매일 꺼내 시곤 했다. 교회에 다른 분 자녀들 이야기로 한바뀌 쭉 돌아 하버드, MIT...코넬..Stanford.. 들을때 마다 태평양을 넘어 얼마 됐다고 그러한 광대한 생각을 감히 가지고 계시고 있을지 의아했지만.
그때는 교포 하버드 교포 재학생이 출판 했는지 명문 대학 입학을 알려 주는 책이 한참 유행했었다.
"하버드 움켜 쥐다", "하버드 101", "꿈과 열정"... 같은 책들이 한국이나 미국 교포 사회에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미디어에도 어느 가정에 누가 어디 들어 갔다고 한국 신문 기사들도 새학기 마다 하버드, 웨스트 포인트, MIT... 학생 인터뷰에 부모님 사진 까지 곁들여 나오고. 어머니도 그런 기사들은 꼭 따로 가지고 있었다 보여 주셨었다.
한국에서 50년 모든 인생을 커다란 이민 가방 몇개에 넣어 태평야 건너 올수 있는 유일한 힘은 결국 자식들에 교육장 마련과 그 배움으로 잘 살아 가는것이니,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에서 보여 주시는 기사들 이었겠지만 좋은 대학은 고사 하고 ESL시간에 파란 눈, 대머리 뚱뚱한 중년 강사와 마주 보는 것 마져 생소하게 영 불편할 때여서, 마냥 듣기 싫기만 했다.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한 답답한 영어 부터, 전공 조차 뭐를 할 지 장님이 길 찾아 가는 것 같은 불안함에 대한 스스로에 화가 겹쳐져서 참으로 듣기 싫은 "콜롬비아 성희" 였다.
또 미국 대학 학창 생활 낭만은 고사하고, 강의 시간 겨우 듣고 쫒으 가면서, 시험 때면 유학온 대학원 형들에게 전 해에 나온, 서로들 복사본에 다른 복사로 희미해진, 시험 공식 풀어 보면서, 그와 비슷한 문제 출제 되면 그 것이 제일 기쁜 대학 생활 하고 있을때, 교회에서 몇년 만에 다시 만난 성희는 이미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졸업뒤에 굴지에 Johnson & Johnson 제약 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니고 있을 때 였다.
"우리 성희 알지 콜로비아 간?. 지금 죤슨 엔 죤슨 제약 회사 메니져야" 이름이 더 길어 졌다. 회사 이름까지 들어 가서. 어머니 역시 어느 학교 간, 어는 누가,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주말 마다 교인 가족들 센서스 하듯이 알려 주셨다.
이십년 넘어 장례식에 다시 인사드린 성희 어머니는, 거진 여든 나이에 기력은 많이 떨어 지셨지만, 기둥 같은 중년 따님 소개는 여전 하셨다. "우리 성희 알지, 콜롬비아 바이올~로지 장학금으로 간, 요즘에는 죤슨 엔 죤스 부사장이야.“
명문 대학 동창들이 더 잘 모이는듯 미국 각지역에서 멀리서 슬픔을 나누러온 대학 친구들 그리고 회사 동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큰 조직에 리더들에 중년들.
이제는 존경 한다.
한국에서 부부가 인생에 가장 큰 결정을 같이 내리고 행동으로 옮겨 다시 새로 시작하는 "이민"에 기둥은 자녀들에 교육이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나이드신 부모님들의 평생 영양분은 그 분들이 깔아준 교육 터에 감사하다고 하고 그리고 배운 바탕으로 잘 사는 것 보여 드리는 거다.
겨우 ESL class 가지고 시작한 나에 대학 생활이지만 이번에 딸 아이가 대학입학 신청 과정을 옆에서 봐서, 미국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십대때 성희는 그때 얼마나 성실하고, 열정으로 여러 학교 활동까지, 이민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밀쳐 나가는 부모님 밑에서 혼자 했었는지, 존경 스럽다.
이제는 진심에 큰 박수 쳐 준다.
조직 사회에 회사 이름과 타이틀이 있기 까지, 그리고 우리 50대 나이에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는게, 얼마 만큼 부지런 하고, 충실한, 실수 하지 않는 매일에 하루 하루가 쌓여 있음을 큰 박수 보낸다. 더구나 여자로서, 남들이 자는 수 많은 밤들을 눈 떠 있었고, 환한 미소들에 회사 임원 단체 사진 뒤에는 gladiator 처럼 무대에서 싸우고 남아서, 또 다른 싸움을 위해 치열한 준비에 연속인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Oh my god! hi how are you? !, Thank you so much for co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