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성의 침묵

사랑의 신은 왜 전쟁을 명령했을까

by Shin란트로

어린 시절, 맛있는 과자를 나눠준다고 해서 친구 따라 교회를 몇 번 갔던 적이 있습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여리고 성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졌다는, 그 신나는 이야기 말입니다. 카드를 넘기며 재미있게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장면에 이르자 우리는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넘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 6:21)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 질문

대학생이 된 후, 성경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을 때였습니다. 교회를 다녔던 것도, 신앙심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지성인이 되었으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읽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멈춰 섰습니다. 손에 든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모르고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죽이라고요?"

"아기도요? 동물까지도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얘기하던데,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을까. 뉴스에서 보는 테러 집단과 뭐가 다른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그 이후 성경을 덮어두었습니다.


3000년 전, 그 시대의 언어로

세월이 흘러 우연히 고대 근동 역사를 다룬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대의 눈으로 읽는 성경은, 사실 3000년 전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으로 쓰인 문서라는 것을요.

당시에는 '헤렘(Herem)'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는 것,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모두 불태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다시 읽어보니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여리고에서 금은보화도, 곡식도, 가축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불태웠습니다.

약탈이 목적이었다면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다만, 성경은 금은동철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즉,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신성한 목적을 위해 구별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명령은 단순히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이방의 종교적·문화적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400년의 무게

레위기 18장을 펼쳤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거기엔 가나안 족속들이 저지른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불에 달군 몰렉 신상에 자기 아이들을 산 채로 올려놓는 일. 신전에서 벌어지는 집단 난교. 근친상간. 동물과의 문란.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너무 끔찍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땅이 그 주민을 토해낸다"고요. 마치 몸이 독소를 거부하듯, 땅 자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적된 악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고. 심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좀 더 기다리겠다고.

400년을 기다리신 겁니다.

이 심판은 방치가 아니라, 오랜 인내와 경고, 그리고 회개의 기회가 반복된 끝에 내려진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이라는 이름의 희망

하지만 여리고 성에서 모두가 죽은 건 아니었습니다.

기생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살아남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신이신 줄 압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온 가족을 살렸습니다.

만약 여리고 성의 다른 사람들도 라합처럼 반응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단지 아무도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심판은 피할 길 없는 운명이 아니야. 진심으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어."


"다 멸했다"는 말의 진실

사사기를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여리고가 함락된 후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수백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죽였다"는 표현은 뭘까요?

고대 근동의 전쟁 기록들을 연구한 학자들이 알아낸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왕들의 기념비에는 으레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적군을 완전히 섬멸했다",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라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과장된 수사법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배가 터지게 먹었다"라고 말하지만 정말 배가 터지지 않는 것처럼요.

그러나 성경의 진멸 명령은 단순한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신학적·역사적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제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문화적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여리고

요즘 뉴스를 보면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합니다. 여리고 이야기는 여전히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요.

"악이 400년 동안 누적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마침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정의일까?"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누구의 책임일까?"

쉬운 답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라합의 이야기를 붙잡습니다. 기회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진심이 온 가족을 살렸다는 것을요.


나팔 소리 너머

어린 시절 신나게 들렸던 여리고 성 이야기는 이제 다르게 들립니다.

단순한 승리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오랜 기다림 끝에 내린 슬픈 결단으로요. 심판이 아니라 방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마지막 선택으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열려 있던 구원의 문이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라합의 집만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붉은 끈이 창문에 매달린 채로.


생각 한 스푼 더:

이 이야기는 여전히 어려운 질문들을 남깁니다. 모든 답을 가진 척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3000년 전의 이야기를 21세기의 눈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읽을 때 보이는 다른 층위들이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불편하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신앙은 모든 질문에 즉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 이야기가 독자님의 삶에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난해한 성경을 헤매다, 뜻밖에 삶의 답을 찾기까지.

우리 함께 걸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