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의 아침

아버지는 왜 칼을 들었을까

by Shin란트로

100세의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오릅니다.

아들은 열네 살쯤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등에는 장작이 지워져 있고, 아들은 불씨와 칼을 들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

아들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합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거야."

이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이야기입니다.


한밤중에 읽은 이야기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미국 이민 생활에 잘 정착하려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해서 교회라는 곳을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친정집은 불교 집안이었지만, 미국이라 그런지 절보다 교회가 더 많았습니다. 친정 어머니도 시집간 딸이니 한 집안에 두 종교인 건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나가니 성경을 선물로 줬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보자 싶었습니다.창세기를 쭉 읽어 내려가다가 22장에 멈춰 섰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 내가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 제물로 바쳐라.” (창세기22:2)

번제. 제물을 죽여서 불에 태워 바치는 것.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신다고?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폭죽처럼 터졌습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이 내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정신병원에 데려가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은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간 걸까요?


신들의 잔인한 요구

몇 년 후, 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지역에서는 장자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몰렉 신전에서는 실제로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불 위에 놓았습니다. 풍년을 위해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제사장들의 노랫소리에 묻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문화권에서 자랐습니다. 갈대아 우르, 그곳도 그런 신들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 이 하나님도 다른 신들과 같은 분이신가보다."


사흘 길을 걸으며

아브라함과 이삭은 사흘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합니다.

사흘.

72시간.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밤에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까요.

때로 저는 이 사흘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할 시간. 돌아갈 수 있는 시간. 질문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아브라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단 위의 질문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묶어 제단 위에 눕힙니다.

칼을 듭니다.

그 순간을 상상해봅니다.

이삭의 눈동자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손을 타고 흐르는 떨림. 하늘은 침묵하고 스치는 바람은 아브라함을 재촉하는 듯합니다.

바로 그때, 음성이 들립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잡습니다.

"네가 하나밖에 없는 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야 알았다."

수풀 속에서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발견됩니다. 이삭 대신 그 양이 제단에 올려집니다.


멈춰진 손이 말하는 것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죽이라"가 아니라 "멈춰라"였다는 것을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다른 신들과 다르다. 나는 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 시대 모든 신들이 요구하던 것을 거부하신 겁니다.

대신 양 한 마리로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 전체에 대한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2천 년 후 같은 산에서

모리아 산.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 근처 골고다 언덕에서, 또 한 번 제사가 드려집니다.

이번에는 손을 멈춰주는 천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예고편이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던 그 대답이 2천 년 후 현실이 된 겁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의 씨름

히브리서를 읽다가 놀라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히브리서 11:19)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 그런데 지금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거야.'

이것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순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제단

요즘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단을 쌓고 있다고.

어떤 사람은 성공이라는 제단에 자기 시간을 바칩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에 자기 건강을 번제로 드립니다. 또 어떤 이는 완벽한 부모가 되겠다는 강박에 자기 자신을 불태웁니다.

우리의 신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완벽하게.

하지만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다르게 속삭입니다.

"멈춰. 그것을 놓아. 네가 바쳐야 할 것은 네 자신도, 네 아이도, 네 미래도 아니야."


수풀 속의 양

이상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쳐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이미 수풀 속에 양을 준비해두셨다는 게.

처음부터 이삭을 죽일 의도가 없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삭의 생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 손에 맡길 수 있느냐.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마음을 보였을 때, 하나님은 즉시 대안을 주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성경은 산에서 내려온 후 아브라함과 이삭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상상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침묵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걸었을 거라고.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보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순종을 보았을 거고요.

그리고 둘 다 알았을 겁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있다는 것을. 두려움보다 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신뢰라는 이름의, 그것을.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

솔직히 말하면, 이 이야기는 여전히 불편합니다.

아무리 "시험"이었다고 해도,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그 순간은 너무나 실제적인 공포였을 테니까요. 그 트라우마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치료라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뒷 이야기보다 제 마음을 더 크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두려움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신뢰했던 것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하지만 모리아 산은 말합니다.

그 두려움 너머에, 손을 멈춰주시는 분이 계신다고.

수풀 속에 이미 준비된 대안이 있다고.


생각 한 스푼 더:

이 글을 쓰는 내내 아이들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무서운 밤길인데, 다섯 살짜리 그 아이는 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엄마만 있으면 괜찮아"라고 말하며 제 손을 꽉 잡습니다.

믿음이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요.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두려워도, 손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손을 잡은 분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

모리아 산의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을 내려왔습니다.

손을 잡고.



이 이야기가 독자님의 삶에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난해한 성경을 헤매다, 뜻밖에 삶의 답을 찾기까지.

우리 함께 걸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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