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들

여자는 정말 잠잠해야 할까

by Shin란트로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리더십 있는 친구였죠. 이것저것 재주도 많고 신학도 공부했습니다.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대.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고 ㅎㅎ."

담담한 듯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쳤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고린도전서 14:3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디모데전서 2:12)

책을 덮었습니다.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2천 년 전 고린도의 소란

기원후 50년경, 그리스의 항구도시 고린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으로 떠들어댔습니다. 예언자들이 서로의 말을 끊었습니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죠.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여성들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들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공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것도 금기였고요.

그런데 교회에 오니 남자들이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여보, 저 사람이 말한 부활이 뭐야?"

"안식일이 뭔데?"

예배 중간중간 이런 질문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예배 시간에 떠들지 말고, 궁금한 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세요."

바울의 목표는 성별 억압이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교회의 건전한 성장에 있었습니다.


읽지 않은 앞부분

그런데 우리는 종종 34절만 읽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을 설명한 앞 구절은 읽지 않은 채로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모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33)

게다가,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성들이 예배 중에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여성의 모든 발언이나 예언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려 했다면, 11장에서 이미 지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앞부분을 읽지 않으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또 있습니다. 아내들에게는 순종하라는, 남편들에게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의 설교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날은 오히려 서로에게 이 말씀을 들이대며 장미의 전쟁이 피어납니다. 그런데 읽지 않은 앞 구절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피차', '서로에게'라는 뜻입니다.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상호적 존중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바울, 그리고 함께 일한 여성리더들

더 흥미로운 건 바울 자신이 여성 동역자들과 함께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로마서 16:1)

뵈뵈는 '디아코노스', 즉 '집사' 혹은 '사역자'였습니다.

"내 친척이며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 중에 유명한 자요" (로마서 16:7)

유니아는 여성 이름입니다. 바울은 그녀를 '사도들 중에 유명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놀랍습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자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훌다는 요시야 왕이 찾아가 물었던 예언자였습니다.

성경은 여성 리더들로 가득합니다.


가르치지 말라는 말의 속뜻

디모데전서를 좀 더 깊이 읽어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퍼지고 있었는데, 특히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이 이 가르침에 쉽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들은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채 이상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르치지 마세요. 먼저 배우세요."

실제로 디모데전서 2:11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배우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말이었습니다. 여성에게 배울 기회를 주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남편들에게 주어진 더 어려운 숙제

에베소서 5장을 계속 읽어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25)

로마 시대에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었을까요.

당시 남편은 아내를 소유물처럼 대했습니다. 이유 없이 이혼할 수 있었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져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아내와 남편 중에 누가 더 어려운 명령을 받은 걸까요?


복종이라는 단어의 진짜 얼굴

'복종하라'는 헬라어 '휘포탓소'를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원래는 군사 용어였습니다. '아래에 서다', '지지하다'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가정에서 이 단어가 쓰일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협력하다', '함께 일하다'에 가까워집니다.

오케스트라를 떠올려봅니다.

지휘자와 연주자의 관계. 지휘자가 독재자는 아닙니다. 연주자들의 소리를 듣고, 조율하고,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갑니다.

연주자들도 지휘자를 신뢰하며 협력합니다.

그게 바로 '휘포탓소'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의 대화

몇 년 전, 교회 소모임에서 한 자매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남편이 사업 실패로 우울증에 빠졌고,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참았습니다. 성경 말씀이니까.

그날 소모임 리더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때리시나요? 모욕하시나요? 학대하시나요?"

침묵이 흘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면, 폭력과 학대는 성경적이지 않아요."

그 자매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남편도 함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복종은 학대를 참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1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요즘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1세기 고린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21세기 로스앤젤레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적 발언이 금지되어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여성들도 신학을 공부합니다. 남성만큼, 아니 때로는 더 깊이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대로 배웠고, 능력이 있고,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면, 성별과 관계없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브리스길라가 가르쳤던 날

저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아볼로라는 유능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학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를 초대해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러" 줍니다.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브리스길라를 여러 번 언급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닙니다.

진리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건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에 차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질서와 사랑 사이에서

바울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린도전서 14:40)

만약 여성이 예배를 방해한다면 잠잠하라.

만약 남성이 예배를 방해한다면 역시 잠잠하라.

만약 여성이 성숙하고 능력 있다면 가르쳐라.

만약 남성이 미성숙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면 더 배워라.

성별이 기준이 아니라, 성숙도와 은사가 기준이었습니다.


우리가 놓친 것들

2천 년 동안 교회는 종종 이 구절들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도구로.

능력 있는 여성 리더들을 침묵시키는 이유로.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여성도 예언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르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지, 아무나 함부로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생각 한 스푼 더: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은사가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 목소리가 있지만 들리지 않는 이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혹시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읽으며, 2천 년 전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을 21세기 보편적 원칙으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문화는 변합니다. 시대는 흐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존중하라. 서로 세워주라. 사랑 안에서 협력하라.

그것이 바울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요.

침묵이 아니라 조화를.

억압이 아니라 존중을.

그런 교회를 꿈꿨던 게 아닐까요.


오늘 이 말씀이 독자님의 삶에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난해한 성경을 헤매다, 뜻밖에 삶의 답을 찾기까지.

우리 함께 걸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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