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기는 약속: 신명기
안녕하세요, 말씀 여행자 여러분! 드디어 약속의 땅 앞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이자, 마치 오래된 지혜로운 멘토가 인생의 마지막 교훈을 들려주듯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신명기'를 여행할 시간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처럼, 광야 40년을 마친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책이에요.
옛 언약의 갱신이자,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삶의 지침들이 가득하죠. 우리 삶의 현실적인 질문들에 대해 신명기는 과연 어떤 해답을 줄까요?
신명기 14장을 보면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리스트가 나옵니다.
돼지고기는 안 되고, 쪼개진 발굽에 새김질하는 동물만 OK.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그리고 날개 달린 곤충은 먹지 말라고 했어요(신 14:19).
"잠깐, 메뚜기는?"
레위기 11장 21-22절을 보면 재미있는 예외 조항이 나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되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대요.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팥중이가 그 리스트에 들어가요.
아,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메뚜기 먹었죠(마 3:4)!
그래서 요즘 고단백, 무공해 식량으로 메뚜기 같은 곤충이 주목받는 걸까요^^
어쨌든 왜 이런 구분이 필요했을까요?
첫째, 위생 및 건강상의 이유가 있었어요. 돼지는 고대 근동의 더운 기후에서 기생충 위험이 높았고, 비늘 없는 물고기는 부패가 빠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셨어요.
둘째, 거룩함의 훈련이었습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구별된 백성"이어야 했어요.
매 끼니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아무거나 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해"를 연습하는 거죠.
셋째, 주변 이방 종교와의 구별이었어요. 돼지는 가나안 지역에서 우상 제사에 자주 사용되던 동물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날 돼지고기 먹으면 안 되나요?
아니요! 신약에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요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고(마 15:11),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어요.
음식 규정의 본질은 "거룩함"이었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과 행실로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 거예요.
육체적인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탐욕이나 죄악된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지키는 '영적인 금식'이 더 중요하죠.
구약의 음식 규례를 통해 우리는 내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이랍니다!
배고픈 세상에 고단백 메뚜기 버거가 나온다면? 감사히 먹어도 됩니다!
신명기 23장 19-20절, 이 구절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네 형제에게 꾸어줄 때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꾸어줄 때에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이거 외국인 차별인가요?
형제, 그러니까 같은 신앙인끼리는 이자받지 말라고 했으니, 외국인에게는 가차 없이 이자를 받아내라는 것처럼 보여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고대 근동의 경제 구조를 알아야 해요.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무슨 뜻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돈을 빌리는 경우는 대부분 생존을 위해서였어요.
사업 확장이나 투자가 아니라, 먹을 게 없어서, 병원비가 없어서 빌리는 거였죠.
형제가 굶주리는데 돈을 빌려주고 이자까지 받아서 더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니잖아요?
신명기 15장 7-8절을 보면 더 명확해요: "네 형제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로 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이건 단순한 대출이 아니라 형제 사랑의 실천이었던 거예요.
그럼 외국인에게는 왜 이자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주로 상인이나 사업가를 의미했어요.
그들은 무역이나 사업을 위해 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이윤을 남겼어요.
이건 현대의 비즈니스 론과 비슷한 개념이죠.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사람에게 적정한 이자를 받는 건 공정한 거래였던 겁니다.
현대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원리는 이거예요: 어려운 형제를 돕는 것과 정당한 비즈니스는 구별하라.
친구가 생활고로 힘들어할 때, 이자 없이 돕거나 아예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명확한 계약과 적정한 조건 설정이 오히려 관계를 보호합니다.
은행 예금 이자는? 문제없어요. 이건 정당한 경제 활동이니까요.
"그럼 동족에게 아예 돈을 안 빌려줘야 하나?" (이자도 못 받는데...)
아니에요! 빌려주되, 사랑으로 빌려주라는 겁니다. 이자로 수익을 내려 하지 말고, 진짜 필요한 형제를 돕는 마음으로요.
그리고 신명기 15장 1-2절에는 7년마다 빚을 탕감해 주라는 규정까지 있어요. 이건 완전히 복지 시스템이죠!
신명기 16장은 세 가지 주요 절기를 명령합니다.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 .
"일 년에 세 번은 네 모든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보일지니라"(신 16:16).
각 절기의 의미는 이래요.
유월절(1월, 봄): "우리는 노예였는데 하나님이 자유케 하셨다!" 출애굽을 기념해요.
칠칠절(3월, 초여름): 보리 추수(첫 수확)를 감사하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걸 기념해요.
초막절(7월, 가을): 포도와 곡식 추수를 감사하며, 광야 40년 동안 초막에서 살았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예요.
현대 크리스천은 어떻게 적용할까요?
신약 시대에 이 절기들은 성취되고 재해석되었어요.
유월절 → 부활절(성찬식):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고린도전서 5:7)이 되시어 죄와 사망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어요.
칠칠절 → 오순절(성령강림절):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했죠(행 2장).
초막절 → 추수감사절: 최종 추수와 재림을 기다려요(요한계시록).
실제로 어떻게 지킬까요?
정기적인 감사와 기억: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해요.
공동체와 함께: 절기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 교회 공동체와 함께 지키는 거예요.
나눔의 실천: 신명기 16장 11절은 "종과 여종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어요. 절기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이었죠.
당시 모든 경제적, 사회적 대표자인 남자들이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가려면, 그 온 가정의 일상은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도 정기적으로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게 주일 예배일 수도 있고, 사순절이나 부활절 같은 교회력일 수도 있겠지요.
신명기 18장에는 "예언자의 말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해졌는데도 그 말이 성취되지 아니하고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이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예언자가 자기 생각으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 18:22)고 되어 있어요.
그럼 '성취되지 아니하고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기간'은 대체 언제까지 두고 봐야 거짓 예언인 줄 알까요?
이 질문, 정말 중요해요!
먼저 예언의 목적과 맥락을 이해해야 해요.
예언은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고,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미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위배되는 예언(예: "하나님이 이혼하래")은 무조건 거짓이에요.
그리고 구체적이고 명백한 기준으로 성취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요.
"내일 비가 올 것이다"처럼 가까운 미래 예언은 즉각적으로 성취 여부를 알 수 있어요.
물론 "70년 동안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는 예레미야 예언처럼 먼 미래 예언도 있어요. 이건 세대를 넘어 성취 여부를 알게 됩니다.
또 "이번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처럼 전쟁의 결과라는 명백한 기준이 있어서 거짓 예언자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어요.
누군가 "OO월 OO일에 예수님 재림!"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했는데 안 왔다면? 거짓입니다.
만약 "곧 치유받을 것이다"처럼 특정 기간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다른 분별 기준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희망'과 '위로'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괜찮지만,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믿고 따르기엔, 조심해야 해요. 절박한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서 '희망고문'이나 '가스라이팅'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언이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가입니다.
성경에 없는 새로운 교리나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예언은 거짓입니다.
둘째로, 예언자의 삶의 열매를 봐야 합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의 삶이 성경적인가, 물질적인 탐욕이나 교만함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셋째로, 모호하고 일반적인 말로 된 예언은 주의해야 합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결과를 끼워 맞출 수 있는 예언은 조심해야 해요.
넷째로, 그 예언이 듣는 이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가, 아니면 혼란과 두려움에 빠뜨리는가 입니다.
신명기 21장 17절: "자기의 시작 곧 맏아들에게는 자기의 소유에서 두 몫을 줄 것이니...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럼 야곱은 율법 위반한 거 아냐?"
이거 정말 예리한 질문이에요! 야곱은 분명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지파씩 차지했으니까요. 르우벤이 맏아들인데 말이에요.
먼저, 타이밍을 확인해 볼까요?
야곱이 죽은 시기는 기원전 1859년경(창 49장)이고 신명기가 주어진 시기는 기원전 1406년 경이예요.
무려 450년 차이가 나요! 신명기의 이 율법은 야곱 이후에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이 율법을 어긴 게 아니라, 야곱의 상황이 나중에 율법이 생긴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겠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율법으로 명시되던 아니던, 고대 사회에서도 장자를 통해 모든 권리가 계승되던 전통은 존재했어요. 그럼에도 왜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었을까요?
역대상 5장 1절이 명확하게 알려줘요: "르우벤은 이스라엘의 맏아들이나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그의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 돌아갔으나..."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했거든요(창 35:22). 이건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어요. 고대 근동에서 왕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왕위 찬탈을 의미했죠.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한 것처럼요(삼하 16:21-22).
르우벤은 육체적인 장자였으나 죄로 인해 장자의 특권을 잃었고, 요셉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기에 실제로 두 몫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단순히 육체적인 출생 순서를 넘어, 인간의 순종과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종종 장남이 장남 노릇 안 하고, 오히려 막내가 부모님을 곁에서 지극정성 돌보며 장남처럼 사는 경우, 그 부모님이 막내에게 유산을 물려주시는 경우를 주변에서 보잖아요.
하나님도 종종 장자의 특권을 뒤집으셨어요.
가인이 아닌 셋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
르우벤이 아닌 요셉 (그리고 왕권은 유다에게!)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는다"는 메시지예요.
신명기의 율법은 일반적인 원칙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 위에 있답니다.
신명기 21장 10-14절: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그 포로 중에서 어떤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연모하거든 그를 아내로 삼고자 하거든..."
"어? 근데 이방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신명기 7장 3-4절: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떨어져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이거 모순 아니냐고요? 아니에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먼저 금지된 결혼(신 7:1-3)은 7개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이었어요.
히위,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사람들은 우상 숭배가 극심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어요. 아이를 불에 태워 몰렉이라는 이방신에게 바치고, 성전 매춘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타락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결혼을 금하셨어요.
허용된 결혼(신 21:10-14)은 전쟁에서 만난 다른 민족 여인과의 결혼이에요.
그것 또한 조건이 있는데, 한 달간의 "정화 기간"이 필요해요.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고, 옛 옷을 벗고, 부모를 위해 한 달간 울도록 했어요.
이 한 달은 뭘 의미할까요?
단순한 외모 변화가 아니에요.
이건 정체성의 전환 기간이었어요.
그 여인이 자신의 옛 종교적 배경과 문화적 연결을 끊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동화(assimilation)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옛 정체성을 벗음: 옷을 벗는 것은 옛 민족, 옛 신앙을 벗는 상징이에요.
애도의 시간: 잃어버린 가족과 고향을 슬퍼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죠.
새로운 정체성을 입음: 이제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들어오는 준비 기간이에요.
이 규례는 전쟁 상황에서 인간적인 잔인함에 노출되기 쉬운 포로 여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인권을 보장하고 자비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려는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보호 장치가 있어요.
14절: "그 후에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거든 그가 원하는 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이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여성 보호 조항이에요! 전쟁 포로였던 여인이 "노예나 재산이 아니라 아내"로 대우받고, 마음이 변하면 자유롭게 보내주라는 거죠.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지만 이스라엘로 편입되어 나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요!(마 1:5)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여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됐어요!
그러니까 이 율법은 이스라엘의 영적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최소한의 자비를 베푸는 균형 잡힌 법이었던 거죠. 민족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문제였어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 하나님은 언제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주세요!
신명기 32장 51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데요?"
민수기 20장으로 돌아가 봐야 해요. 백성이 또 물이 없다고 불평했어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어요(민 20:8).
그런데 모세가 뭘 했냐면, 화가 나서 백성들에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 20:10) 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어요.
뭐가 문제였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명령하라고 했지 반석을 내리치라고 하지 않으셨거든요!
둘째, "우리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건데 마치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말했어요. 백성을 위해 물을 내는 주체가 자신인 것처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했어요.
셋째, 화를 내며 백성을 "패역한 너희"라고 불렀어요. 하나님은 여전히 백성을 사랑하셨는데, 모세는 자기 감정을 담아냈어요.
넷째, 반석의 상징을 훼손했어요.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해요(고전 10:4). 한 번만 쳐지면 물이 나오는 것(첫 번째는 출 17:6에서 쳤어요)은 그리스도가 단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해요. 두 번 쳐서 그 의미를 흐리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도 백성들 때문 아니에요?"
신명기 1장 37절에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도 진노하사"라고 말했어요. 모세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백성이 정말 빡치도록 짜증 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모세의 반응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어요. 아무리 원인 제공자가 외부에 있어도 모세 스스로 선택한 반응이었죠. 40년간 참아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감정을 못 이긴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 가혹한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더 큰 책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48절: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사람이에요(출 33:11). 그만큼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했어요. 지도자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니까요. 책임이 요구되는 위치였죠.
그래도 하나님은 그간 고생한 모세를 사랑하고 위로해 주셨어요.
느보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직접 보게 해 주셨어요 (신 34:1-4)
모세를 직접 장사 지내 주셨어요 (신 34:6)
나중에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나게 하셨어요! (마 17:3)
모세는 가나안에는 못 들어갔지만, 천국에는 들어갔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 이게 사실이야?" 하는 부분들이 나와요.
만나라는 식사거리가 40년 동안 하늘에서 떨어졌대요(출 16:35).
그것도 믿기지 않는데, 맨날 똑같은 거 먹던 백성들이 "만나는 질렸어! 고기 먹고 싶어!"라고 불평하자,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거예요.
한 달 동안 메추라기 고기도 제공하셨대요! (민 11:19-20)
점점 강도가 세어져서, 40년 동안 옷과 신발이 안 해어졌다네요?
신명기 8장 4절: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고 29장 5절: "네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네 발의 신이 해지지 아니하였으며..."
"이거 어떻게 믿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건 초자연적 기적이에요.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하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홍해가 갈라진 건 믿는데 옷이 안 해어진 건 못 믿겠어요?
매일 하늘에서 무언가 먹을거리가 내린 건 믿는데 옷이 보존된 건 의심돼요?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저희 담임 목사님이 어릴 적 얘기를 해주셨어요. 옛날에는 동네에서 굿 같은 걸 자주 했는데, 그때 무당이 시퍼런 칼날 위에 서서 춤추는 걸 보셨대요. 무당도 신이 내리면 저렇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란 신이 직접 이 땅에서 못하실게 무얼까요?
이 기적의 의미는 "내가 너희를 완벽하게 돌봤다"는 거예요. 음식만이 아니라 의복까지, 발 건강까지 신경 쓰셨다는 증거죠.
실제로 가능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해요:
아이들은 자라니까 당연히 옷이나 신발이 작아지겠죠? 아마 서로 나눠 입고, 물려받고, 그럼에도 기적적으로 충분했다는 의미일 수 있어요.
"해어지지 않았다"는 건 "비정상적으로 오래갔다"는 뜻일 수도 있고요.
지금 우리 삶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염려하는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신다는 거예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말씀 여행자 여러분 중에도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었던 순간들이 한 번쯤 있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냈지?' 싶게 다 지나왔음을 문득 깨달은 적 없으세요?
이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든, 과장법으로 이해하든, 메시지는 동일해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신다!"는 거예요.
민수기 13장 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고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낙 자손들은 진짜 그렇게 컸어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첫째, 실제로 평균보다 훨씬 컸을 수 있어요.
골리앗의 키가 6규빗 반, 약 2.9미터(삼상 17:4)에요.
옥의 침상이 9규빗, 약 4미터(신 3:11), 침대니까 좀 더 크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요.
고대에도 거인들은 있었어요. 유전적 요인, 영양 상태, 특정 부족의 자연환경으로 인해서 말이죠.
둘째, 과장법일 수 있어요.
"메뚜기 같았다"는 표현은 두려움의 과장일 수 있어요.
정탐꾼 10명은 두려움과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에, 강력한 적을 실제보다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로 인식했을 거예요.
마치 작은 강아지에겐 사자가 엄청난 거인으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라는 표현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이 아낙 자손을 보고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키가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 문제였던 거예요.
셋째, "네피림 후손"이라서.
창세기 6장 4절: "그때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떨어진 자들" 또는 "폭군들"이란 뜻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타락한 천사와 인간 사이의 혼혈이라고 주장하고, 이건 아직도 논쟁적이에요. 어쨌든 이들이 강하고 무서운 전사들이었다는 거죠.
현재 우리에게 의미 있는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문제예요!
10명: "그들은 너무 크고 우린 너무 작아!"
2명: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들의 크기는 상관없어!"
다윗도 골리앗을 이긴 건 덩치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었죠(삼상 17:45).
신명기 읽으면서 머리 아프셨죠?
당연해요.
이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니까요.
율법도 많고,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많고, "이건 좀..." 싶은 구절들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질문들이 중요한 이유가 뭘까요?
진짜로 성경과 씨름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라고 파고드는 거잖아요.
이 책의 목적은 '~하라' '~하지 마라' 헬리콥터 부모처럼 일거수일투족 간섭하려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랍니다.
신명기의 모든 율법과 규정 뒤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요:
내 백성이 거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내 백성이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내 백성이 나를 신뢰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너희는 나의 특별한 백성이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모세의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를 읽으며, 우리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워가요.
완벽하게 이해 못 해도 괜찮아요.
질문하면서, 씨름하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거니까요.
이번 주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멋진 여행 하시길 바라며, 궁금한 거 생기면 언제든 또 함께 나눠가요!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