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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Sep 05. 2022

제철 과일

추석 이야기(1)

‘시도 때도 없다’는 말이 있다. 때가 정해져 있지 않고 아무 때나 벌어진다는 말이다. 나는 요즘 과일을 살 때면 종종 ‘시도 때도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시도 때도 없는 과일을 먹은 지 꽤 됐지만, 내 뇌는 아직도 과일에는 일정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뭐가 맞는 기억인지조차 헷갈리는데, 봄의 첫 과일은 딸기다. 단것이 귀하던 시절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향기 또한 최고였다. 딸기를 모아놓은 바구니에서 풍기는 딸기향... 초등학교 시절 일본제 지우개를 갖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지우개에서 딸기향이 났다. 신기했다. 지우개에서 단맛도 날 것 같았다.


내 기억에 딸기는 대략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한 달 정도가 제철이었다. 그러던 것이 하우스 재배의 영향인지 점점 출하가 앞당겨지더니 이제는 2월에 첫 딸기가 나온다. 딸기는 이제 봄 과일이 아니라 겨울 과일인 것이다. 그러다가 예전의 제철인 4월이 되면 딸기는 자취를 감춘다. 이 바람에 나는 딸기를 과일의 시와 때를 혼란스럽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지난 겨울 선물받은 딸기. 사진을 고르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작년 12월 22일에 받았다. 딸기는 진짜 아무때나 먹는 과일이 되었다. 지금도 마트에 있을까.


딸기가 사라질 때 쯤 참외가 등장했다. 딸기의 빨강을 시샘이라도 하듯 참외의 노랑이 시장을 장식한다. 과거에는 달지 않고 무 같은 참외도 있었다. 단맛은 향기를 동반한다. 그래서 참외를 살 때면 참외 윗부분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곤 했다. 참외도 딸기처럼 시장에 나오는 때가 점점 앞당겨져서 과연 요즘 참외의 제철은 언제인지 궁금하다. 참외가 나올 무렵 자두도 같이 나오지 않았던가. 자두는 내가 잘 먹는 과일이 아니라서 과거나 지금이나 때를 잘 모르겠다. 


참외가 사라지기 전에 수박이 등장한다. 당도를 표시하는 브릭스(brix)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 수박 살 때는 삼각형 칼집이 기본이었다. 무쇠로 된 식칼로 수박 윗부분에 삼각형 칼집을 낸 후 칼로 푹 찍어서 뽑아내면 수박의 속살을 볼 수 있었다. 짙은 붉은 색에 씨까지 검은 색이면 다행이지만, 대충 붉고 씨도 노란색이면 손님과 과일 파는 아저씨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마트에서 브릭스 표시를 보고 수박을 산다. 11 브릭스면 기본은 된다. 12 브릭스면 더 달지만, 값이 비싸다. 하지만 삼각형 칼집보다는 훨씬 더 정확하다. 


이 수박은 돈과 가장 밀접한 과일(*)이라고 생각한다. 7~9kg 정도 되는 수박은 올해 보통 2만원 내외인데, 일부 가게에서는 무려 5만원 가까운 수박도 판다. 가격의 편차가 이만큼 큰 과일이 또 있나? 그리고 요즘은 한겨울에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박을 살 수 있다. 한여름 더위를 날려주던 수박은 이렇게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다.


수박을 먹을 만큼 먹었을 때쯤 복숭아가 나온다. 얼마 전부터 복숭아는 산지 표시와 품종을 표시해서 판다. 올해는 두 가지로 대별해 놓았다. 아삭 복숭아와 햇O레 복숭아다. 내가 원하는 건 햇O레 복숭아다. 과육이 말랑말랑하고 단맛이 강한 이른 바 백도 계열의 복숭아다. 하지만 매번 다 그렇게 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한 길 사람 속도 알기 어렵지만, 복숭아의 단 맛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에 사온 복숭아는 틀림없이 햇OO이었지만, 정작 먹어보니 아삭이었다. 기다리면 후숙(後熟)으로 물러질까? 나는 기다리지 않고, 모두 주스로 갈아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복숭아를 한 번 더 살까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복숭아는 그나마 제철이 비교적 분명한 과일 같다. ‘아마도 보존의 어려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쓰고보니 복숭아 통조림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플 때 맛볼 수 있던 단것이었다. 바나나와 함께. 그 영향 때문에 나는 지금도 냉장고에 백도나 황도 통조림을 하나씩은 넣어놓는다. 촌스럽다는 아내의 놀림을 모른 척 하고.


복숭아가 전성기를 넘길 때 포도를 만난다. 어린 시절 먹던 포도는 흔히 먹포도라고 했다. 요즘은 포도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알이 아주 큰 거봉, 먹포도와 가장 비슷한 캠벨, 화이트 와인의 기본 품종인 머스캣, 그리고 전통의 청포도. 


포도가 사라질 때 쯤 과일의 지존이라 할 사과가 등장한다. 홍동백서, 제사상 동쪽에 놓일 사과가 나올 때면 서쪽에 놓일 배도 나온다. 사과와 배는 꽤 오래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선물용 사과와 배 세트. 포장이 늘 과하다.


어린 시절의 사과는 대략 세 종류였다. 알이 좀 작고, 과즙도 풍부하지 않은 국광. 익으면 아주 빨개지는 그 빛깔만으로도 사랑스런 마음이 생기는 홍옥. 그리고 약한 연둣빛이 나는 청사과. 


일본에서 후지(부사-富士) 품종이 들어온 후 국광도 홍옥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명맥이 유지되는지 모르겠다. 사과의 빨간 껍질과 노란 속살은 과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다. 사과와 배는 초겨울 까지는 얼마든지 먹고, 보관을 잘 하면 한겨울까지도 먹을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사과는 겨에다 담아서 판매도 하고 보관도 했다. 사과 배가 제철일 때 함께 등장하는 과일들이 있다. 밤과 대추다. 여기서 반짝 퀴즈 한 가지. 떫은 맛이 나는 밤의 속껍질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은 무엇일까요?(**)


단풍이 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감이 열린다. 감이 모습을 보이는 건 8월부터니까 열린다기보다 익는다가 맞겠다. 감은 단것이 귀할 때 더할 나위없는 간식이었다. 잘 익은 감이 가득한 감나무는 주황색 등불이 켜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울 도심의 단독주택에서도 감나무에 감이 열린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이것도 옛말이 되었다. 감을 말리면 겨우살이의 중요한 간식인 곶감이 된다. 하얀 시설(柹雪)이 핀 곶감.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그 곶감. 


곶감을 떠올리다가 하마터면 마침표를 잊어버릴 뻔 했다. 귤, 여전히 한겨울의 주요한 비타민 공급원을 자처하는 귤. 부족한 지식 때문에 귤의 파생 상품 정도로 생각하는 과일도 무척 많다. 한라봉, 천혜향, 백리향, 황금향...


뿐만 아니라 수입 과일은 1년 사시절 언제든지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재배하는 바나나와 키위부터 오렌지와 파인애플, 망고, 체리, 용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하도 시도 때도 없이 과일이 쏟아져 나와서 라떼스럽게 한마디 한다는 것이 길어졌다. 요즘 어린이나 젊은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때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딸기는 한겨울에 나오는 과일로 아는 어린이들도 있을지 모르겠고.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연식이 꽤 된 노래로 대신한다.

     

<그리운 생각

그립다 생각나면 /조용히 눈을 감자 / 잃었던 조각들이 / 가슴에 피어 난다

아득히 가버린 / 그 사람 지금은 없어도 / 마음을 조이며 / 기다리는 기쁨도 있다

(전우 작사/김기웅 작곡/정미조 노래/1972년-작사,작고자와 연도는 인터넷에서 확인했다)


그렇다. 기다리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철 과일의 다음 글은 토란 이야기입니다. 추석이 낼모레인 지금, 신데렐로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토란 이야기는 낼모레 수요일에 올릴 계획입니다. 그럼 이만...


*과일과 채소 : 어떤 식물이 과일이고 어떤 식물이 채소인가에 대해서는 기준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나무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과일이라고 한다는 기준에 따르면 수박과 참외는 과일이 아니다. 다년생이냐 일년생이냐에 따라 분류하자면 딸기는 과일이고 수박과 참외는 채소다. 수박과 참외는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풀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기준으로 단맛의 유무를 꼽을 수도 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수박과 참외는 과일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과일과 채소의 중간쯤 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과채류라는 표현도 있다. 흔히 수박과 참외에 적용한다.

  이 외에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 밥과 함께 반찬으로 먹거나 주식으로 먹는 음식은 채소류고, 그렇지 않으면 과일류다. 예를 들면 토마토는 ‘빼박 채소’이고, 참외 수박은 과일이다. 딸기? 과일이다. 딸기, 사과, 배, 감을 주식이나 반찬으로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채소류?

**정답은... :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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