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아들 둘 맘과 유모차를 끌고 동네 놀이터를 돌던 때였다. 임테기 두 줄 얘기를 하자 자기 일처럼 반가워하더니 최근 꾼 꿈 얘길 했다. 커다란 꽃이 꿈에 나왔단다. 아들 욕심이 있던 내 마음을 알았는지, 꽃이 크면 아들 태몽이라고 덧붙였다. 그날 커피를 내가 사면서 그 꿈은 내 것이 되었다.
결혼 후 3년 만에 낳은 딸아이에게 세 살 터울 나는 동생을 주고 싶었다. 남편은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세자'라는 태명을 정하며 슬쩍 속내를 비추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양가 부모님과 어르신들 아들 얘기에 나 역시 어느샌가 세뇌되었던 시절이었다.
네 살 딸아이와 집 앞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을 갔다. "아기 내복 분홍색 살까요 파란색 살까요?" 옛날 옛적 고리타분한 질문을 나도 하고 있었다. 연두색이나 노란색으로 사라는 답변 정도를 예상하던 내게, 의사 선생님은 딸아이를 보며 웃었다.
"동생은 아빠랑 목욕탕 가야겠네."
말을 하고 글씨 쓰기를 시작한 딸이었다. 떼부림과 잠투정도 최고치를 찍던 봄, 동생 나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도서관 책품앗이, 문화센터 오감발달 발레 수업 열심히 다녔다. 점점 배가 불러왔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장보고 들어오던 길, 묵직한 배가 아래로 처지는 느낌이 확연했다.
"세자야, 5월에 만나."
뱃속에서부터 누나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을까. 5월 30일 예정일의 세자는, 5월 1일 일요일 아침, 이제 5월이니 나가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예정도 계획도 경황도 없었다. 설마 오늘 나오겠어하면서 생리대 큰 걸로 흐르는 그것을 막고 세 식구가 쫄래쫄래 집을 나섰다.
소변볼 때 살짝 흐르던 그것은 양수였다. 둘째 엄마는 뭔가 다를 거라 했지만 오만이고 자만이었다. 양수가 터졌으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핑크색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던 9개월 간 다닌 병원 말고, 원주시에서 가장 큰 (또는 유일했던) 대학병원으로 갔다. 그 와중에도 허름하고 낡은 병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래를 툭 하고 터뜨리니 소변 같은 그것이 울컥 쏟아졌다. 주삿바늘이 꽂히고 의사 간호사가 왔다 갔다 하더니 바로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침도 시원찮게 먹은 딸이 걱정되어 근처 가서 칼국수라도 먹고 오라고 재촉했다. 남편은 머뜩찮은 표정으로 딸아이를 챙기러 나갔다.
'나 이제 나갈 건데 아빠랑 누나 어디 가?'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세자는 덜컥 화를 냈다. 진통 간격이 확연히 짧아지더니 사정없이 엄마를 아프게 했다. 분명히 겪었던 고통인데 확실히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분만실로 옮겨지고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오만 인상을 쓰던 차에 잠시 눈을 떴다. 약 스무 개의 눈들이 나의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뿔싸, 인턴 레지던트들인지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대학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다고 들었지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수치심을 느낄 틈도 없이 세자는 온 힘을 대해 세상에 나오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곳에 힘을 주길 몇 번이나 했을까. 세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36주 미만의 미숙아였다. 2.5kg 미만이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간다고 했었다. 35주 6일, 2.65kg의 세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12년 전 오늘을 추억하는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열세 살 세자는 집을 나섰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 입술에 뽀뽀하지 않는다. 배고플 때 말고는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여섯 살 생일 케이크의 초를 끄던 개구쟁이 눈빛이 이따금씩 보인다. 순하고 부드러운 연둣빛과 쨍하고 싱그러운 초록빛의 중간 어디쯤에 온 5월의 첫날, 그 눈빛이 나를 웃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