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친해질 수 있을까

네번째 최애 계절

by 씬디북클럽



빈약한 가슴골 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샤워를 하고 나온 직후다. 물기를 수건으로 톡톡 닦아내자마자 땀이 송송 맺힌다. 스킨로션 선크림 최소한의 화장으로 외출 준비를 하는데도 얼굴에는 이미 한 겹 두 겹 덮어쓰는 느낌이다. 아이쉐도우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눈두덩이까지 세 겹 덮어쓰고 나서야 끝이 난다.



출근 전 남매의 간식과 저녁을 준비한다. 냉장고를 열어 채소들을 꺼낸다. 오늘 저녁 메뉴는 유부초밥. 빨강 주황 노랑 파프리카, 하얀 양파, 초록 애호박을 도마 위로 올려 칼로 착착 썬다. 채소를 즐기지 않는 남매를 위해 작게 더 작게 솜씨를 부려 본다.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화르륵 열기가 일어난다. 인덕션으로 바꿔 보라는 영업 사원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기름을 두르고 양파를 먼저 볶는다. 촤르륵 다시 한번 열기가 일어난다.


에어컨은 거실 구석에 있다. 주방까지 냉기를 보내 줄 아량 따위는 없다. 선풍기를 가까이 하자 가스레인지 불꽃이 춤을 춘다. 그 춤사위를 따라 내 마음도 춤을 춘다. 아, 정말 출근하기 싫다.


방마다 선풍기를 넣었다. 1인 1 선풍기는 밤새 잘도 돌고 돌아간다. 타이머를 해 놓은 시간이 끝나자마자 잠이 깨어 다시 설정하고 잠들기를 반복하는 밤이다.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니다.


열대야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방 밖의 온도가 25도 이상인 무더운 밤이란다. 폭염이란 단어도 검색해 보았다. '염'자에는 무려 '불 화' 두 개가 포개어 있다. 글씨만으로도 덥다. 뜨겁다.





가족들과 여름휴가 계획을 세웠다. 딸은 응원하는 야구팀의 홈경기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워터 파크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전직 대통령이 책방지기로 있는 서점을 들르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휴가 때 하고 싶은 거 없어?"

"나는 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딸이 응원하는 야구팀은 올해 '기세'를 몰아치고 있다. 9연승으로 집안을 들썩이게도, 어이없는 실책으로 집안을 고요하게도 만든다. 아빠를 닮아 모태 갈매기가 된 딸은 폰으로 야구 일정과 선수들의 일상을 검색한다. 제 용돈을 보태어 최애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에 넣었다.

딸과 남편이 응원하는 야구팀의 홈경기를 볼 수 있는 곳은 남편의 고향이다. 나의 시댁이기도 하다.



"휴가는 휴가답게 다녀옵시다."


거기까지 간 김에 하루는 부모님 댁에서 자고 오자는 남편에게 못을 박았다. 하루 시댁에서 자면 하루 숙박비는 아낄 텐데. 어머님표 집밥도 먹을 텐데.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꽝꽝 박았다.


"아들(애들) 방학하믄 내려온나. 요 앞 계곡에 물이 불어서 시원하니 놀기 좋다. 송사리 잡고 닭 삶아 먹고 수박 먹으러 놀러 온나."

어머님 몸도 안 좋으시고 힘드셔요. 송사리 한 마리 당 100원씩 용돈을 받으러 물장구를 치던 어머님 손주들은 이제 백만 년 전으로 사라졌어요. 두어 달 후면 추석이니 그때 길게 뵈러 갈게요.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을 참고 어물쩍 "네, "하고 전화를 끊은 직후 남편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거기까지 가는데 얼굴 한 번 뵙고 와야 안 되겠나."

"날도 덥고 부모님 힘드셔."


생략된 주어는 1인칭이었다.








착착착 썰어 볶은 채소를 밥과 비벼 한 김 식혔다.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부의 물기를 짰다. 꽉 다문 유부의 입을 벌려 잘 섞인 밥을 넣어 꾹꾹 눌렀다. 나란히 열 맞춰 도시락통 두 개를 만들었다. 비닐장갑 안이 뿌옇게 된다. 뒤집어 벗는 손가락 사이로 땀이 고인다. 설거지를 하는데 고무장갑이 녹아내린 분홍의 것이 그릇에 묻는다. 매일 내다 버리는데도 음식쓰레기 날파리들이 다시 들러붙는다.


속옷과 살이 닿아 자주 쓰리고 아픈 계절. 연고를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야하고 싶은 의도가 없음에도 종종 노출을 감행한다. 빈약한 가슴골 사이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출근 5분 전, 선풍기 앞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물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팥 맛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800원짜리 하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녹기 시작하더니 하얀 블라우스 앞섶으로 한 방울 뚝 떨어진다.


여름을 네 번째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 과연 좋아할 수 있을까.

....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여름은?


무거운 아기일 거야.

축 늘어지는 뱃살일걸?

질질 끌리는 모래주머니지

낮잠을 구르는 방석이라고.

흐물거리는 비눗방울이야.

아냐, 녹는 젤리 같아.


끈적한 풀이야.

물 먹는 하마라니까!

칭칭 감기는 물뱀이었어.

따끔한 고슴도치 바늘이야.

뜨끈뜨끈 찜질팩이지.

아무튼 여름은 더워.


(여름, 이소영 그림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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