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는 선풍기를 끄고 잠이 들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창문을 조금 닫았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 지나간다.
이 여름 나를 관통한 세 단어들을
기억하고 기록해 본다.
#1 시
나는 '시알못'이다. 시는 시간 많고 한가한 사람들이 읽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 나만 알고 싶지만 모두가 알았으면 싶은 작가님의 신간이 도화선이 되었을까. 추천하는 책과 영화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능한 한 읽고 보았던 나였지만, 시라니, 시를 읽고 나누자니.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펼쳐 들었다. 6월의 시집은 나무에 기대고 꽃을 보려 자세를 낮추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7월의 시집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8월의 시집은, 아,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시인은 녹슨 구리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담아 따라 쓰고 조심스레 스티커를 붙였다. 윤동주 문학관에 들러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광복절 아침에 본 영화 '동주'에서는 강하늘 배우의 음성이 시인의 그것인 양 시집 위로 겹쳐졌다. 오래오래 함께 하고픈 지인들에게 시를 읽어보지 않겠으냐고 손을 내밀었다. 한 달에 한 권 시와 그림책, 1년의 시집으로 책탑을 쌓을 내년 여름을 기다린다. 시와 함께 단단하고 담담하게 다져질 나의 모습을.
#2 작가
내가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의 이름을 책 안쪽에 정성껏 적어 주었을 때 그 책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쓰고 만든 이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언제나 귀하고 소중하다. 서명을 받고 나서는 책도 작가도 더욱 특별해지고 애틋해진다. 좋은 시간을 선물해 준 많은 작가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올여름 직접 뵐 수 있었던 작가님들)
최정은, 사춘기 엄마의 그림책 수업
전안나, 나의 마흔에게
이화정, 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장일호, 슬픔의 방문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윤소희,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어
문재인, 책 읽는 사람
김신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황선우, 김혼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김혼비, 아무튼 술
#3 초록
"8월엔 초록이죠!" 드레스 코드를 정하는 모임에서 초록을 입고 만나기로 했다. 미리 정하지 않고 자리 잡은 카페는 '오설록'이었다. 갈색 바탕에 초록 꽃과 푸른 잎이 그려진 원피스를 여러 해 여름동안 즐겨 입고 있다. 가까이 두기로 한 첫 시집도 초록, 두께만큼 여운마저 깊은 소설의 표지도 초록이다. 폭염을 피해 이른 시간 나선 산책길에서는 초록을 눈에도 폰에도 부러 담았다. 얕은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어린이집에서는 연둣빛이었던 잎들이 "마 이게 바로 초록이다!" 뽐내듯 초록빛 물감을 덧칠했다. 연하고 여리던 아이들은 찐 초록 개구쟁이들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짙게 여물고 있다.
마이 그린 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