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역에는 대학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41회 마로니에 여성 글쓰기 - 기억의 서랍

by 씬디북클럽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왔다.


아는 길인데 기억이 흐릿했다.

일곱 글자만이 또렷했다.

20년 전에도 그랬다.




가시칠엽수의 프랑스 이름 '마로니에'가 많이 심어져 있는 공원. 옛 서울대의 문리대와 법대가 자리했었단다. 꿈과 낭만이 어린 문화 예술의 거리로 지금은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한단다. 이곳이 무려 그런 곳이었단다.


여성들만의 글쓰기가 매 년 가을 이곳에서 열린 지 올해로 41년째다. 국민학교 시절 백일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교통질서 백일장이었던가, 환경 보호 백일장이었던가, 새 질서 새 생활 백일장이었던가. 상을 받았던가, 못 받았던가, 참여 기념품으로 만족했던가. 도통 기억이 없다.


미리 정한 24개의 주제 가운데 즉석 추첨으로 네 개가 정해졌다. 새벽, 어머님, 삼겹살, 서랍. 원고지 스무 장을 받아 들고 근처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하던 아메리카노가 차가워졌지만 괜찮았다. 은행나무 아래 응달로 지나가는 바람이 서늘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하늘도 구름도 공기도 햇살도 다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건 수시로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뿐이었다.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한동안 시작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연필을 들었다 펜을 들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악의 없이 뱉는 말들이 자꾸 맴돌았다. 잊고 싶은 기억들을 잊은 채 살아가다가 한꺼번에 몰아칠 때가 있다. 10월의 어느 멋진 오늘이 바로 그때가 될 줄이야.


"쓰고 싶은 이야기는 반드시 쓰십시오."


시인의 말을 미리 들었더라면 반드시 썼을까. 쓰고 싶은 이야기를 이만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저장해 놓은 썼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 원고지에 옮겨 썼다. 쓰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안 되는구나.


축하의 선의보다 입상의 욕망들이 더 많았을 시상식. 상금, 수상 두 글자는 내 것이 아니었다. 하늘 바람 구름 나무 초록 연두 노랑 가을 낮맥 길맥 노래... 다른 많은 두 글자들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그것이면 됐다.







스무 살 겨울 서랍을 열었다.

혜화역 2번 출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쌩 하고 바람이 차게 분다. 목도리를 하고 올 걸. 고동색 떡볶이 단추가 달린 갈색 더플코트 앞섶을 꼭 여맨다. 장갑도 깜빡 한 두 손을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는다.

방학이지만 과외 아르바이트가 두 개나 있는 날이라 이제야 도착했다. 넘어갈 듯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는 해를 본다. 다홍색 주황색 빨간색 모두 섞으면 저 색이 나올까. 형용할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내쉰다. 후 내쉬는 숨이 하얗게 퍼진다.


오늘도 음악 소리가 들린다. 번쩍이는 조명 사이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든다. 아무 걱정 없는 사람 같은 그들이 보이고 들린다. 앞만 보고 달릴 듯이 걷는다. 열린 귀를 애써 닫는다. 여기에 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저기로 가야 하는 걸음을 재촉한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 한숨을 심호흡으로 바꾸고 문을 연다.

파리한 그녀가 반색하며 일어선다. 온전한 끼니도 못 먹은 게 분명한 얼굴로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본다. 한숨 돌리고 오라고 그녀를 떠밀듯 내보내고 혼자서 그를 바라본다.


초점 없는 눈, 콧줄이 연결된 코, 멍청이같이 벌려진 입, 밤톨처럼 빡빡 깎은 머리, 피가 묻은 스테이플러 자국... 환자 하나 살려내지도 못하면서, 대한민국 최고 대학병원 타이틀은 개나 줘 버리라고 해.

쉬지 못하는 그녀가 들어온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의식 없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도 혼자만 잡는 손이 속상해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어깨를 보듬는다.


우리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다시 혜화역 2번 출구에 왔다.

마흔 살의 가을이다.


굳게 닫았던 서랍을 연다. 먼지 뽀얀 기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허겁지겁 손으로 집어 도로 넣다가 삐뽀삐뽀 소리에 멈칫한다. 주워 담던 기억 중 하나를 꺼낸다. 한참을 바라본다. 마주할 수 있을까. 말로 할 수 있을까.


연필을 든다. 말로 할 수 없었던 기억을 꾹꾹 눌러쓴다. 이제는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눈물을 꾹꾹 눌러 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