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언니에게

주말부부일기 #16

by 씬디북클럽



언니, 안녕하세요.

저예요. 소영이, 씬디요.


"이게 누구야, 씬디!" 하면서 느낌표 100개 정도의 솔 톤 음성으로 받아 줄 언니임을 알면서도, 저는 전화가 아닌 이렇게 글을 씁니다.


말할까 말까는 하지 말고, 먹을까 말까는 먹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쓸까 말까는 써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며칠 고민하다 비로소 씁니다. 미리 연습도 말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뱉어져 주워 담을 수 없이 흩어져 버리죠. 그에 비해 글은 생각하고 쓰고 지우고 덧붙이고 빼다가 결국은 내 의사와 가장 유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도 쓰고 지우고 덧붙이고 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보내지도 읽히지도 않을 글을 말이에요.


지난 주말 밤, 언니 이름이 뜬 전화벨이 울렸어요. 자고 있지 않았고요. 바쁘지도 않았어요. 주말을 마무리하는 나른한 시간, 전화기도 옆에 있었어요.


맞아요,

저는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언니 이름이었으니까요.


언니를 처음 만난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나와 함께 있던 오빠가 언니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던 기억이 아마 제일 처음이었을까요. 같은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일 뿐이고, 소개팅을 시켜 달라고 해서 친구 한 명과 같이 만나기로 했을 뿐이라고 했지요. 정말 그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엉엉 울었어요. 사귄 지 얼마 안 된 오빠의 사투리 억양은 이미 신이 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오빠의 미소가 짧은 통화 내내 떠나질 않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울 일인가 싶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거든요.


빠른 1월생 오빠에게 그 해 12월생 언니는 기어이 '오빠'라고 부르겠다고 고집했죠. 오빠가 말 편히 하라고 친구 하자고 했는데도 말이죠. '오빠'라는 단어는 오빠의 친동생 말고는 나만 부르고 싶은 두 글자였는데도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거든요.


스물세 살의 내게 스물여섯 살의 언니는 뭐랄까,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운전을 하고, 집도 잘 살고, 영어도 잘했죠. 날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체형에 어울리는 옷을 입을 줄 알았어요. 가슴이 작지 않고 다리가 밉지 않은 체형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남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옷들을 입을 줄 알았지요.


유복한 가정의 딸 부잣집 막내딸이어서였을까요. 사랑을 많이 받아 그만큼 사랑을 여기저기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영어든 한국어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었죠. 내게 없는 사교성은 닮고 싶은 적도 있었음을 고백해요.


술은 또 얼마나 잘 마셨던지요. 아니, 얼마나 좋아했던지요. 주종을 가리지 않고 잔에 따라 목으로 넘기는 모든 것을 마시기를 좋아했고, 후다닥 안주를 요리해 내놓기를 좋아했죠. 언니 집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했어요. 이른 저녁 시작한 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죠. 술에 취한 언니는 친구들에게 자고 가라고 권했죠. 반달처럼 동그랗게 되는 눈웃음과 크게 벌려도 가지런하고 고른 치아와 반토막난 혀 짧은 목소리를 내면서 말이죠.


오빠의 엄마를 처음 만났던 날, 언니도 함께였던 거 기억하나요. 12시간의 비행과 기내식 세 번을 먹어야 도착하는 남쪽의 아름다운 나라에서 말이죠.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들이 잘 있나 보고 싶어서, 지인의 집에 인사 나누고 싶어서, 그리고 아들의 새 여자친구를 어디 한 번 볼까 싶어서 오셨더랬죠. 나는 앞으로 입지도 않을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를 준비했어요. 긴장되고 초조하고 떨렸어요. 사진에서처럼 오빠와 꼭 닮은 눈매와 코가 보았지만,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인사를 드렸죠. 차문을 열어드린 것이 좋으셨을까요. 아니면 앞 좌석 아들 옆 좌석을 내어 드린 것에 점수를 후하게 주셨을까요. 스물셋의 저는 그 와중에도 참하고 조신한 인상을 보이고 싶었 것 같아요.

그날 언니에게 같이 만나자고 한 건 나였나요, 오빠였나요. 아니면 언니가 같이 만나자고 했었나요. 오빠, 오빠의 엄마, 나, 언니 이렇게 넷이서 드라이브를 하고 바닷가에 가고 밥을 먹었지요. 모래밭에서 찍은 세 여자의 사진에서 언니는 오빠의 엄마의 팔짱을 잘도 끼고 있네요. 오빠의 엄마의 반대쪽 팔을 잡은 손도, 카메라를 향해 웃는 눈도, 나는 죄다 어정쩡하기만 한데 말이죠.


그날도 언니는 대화를 주도했어요. 재미있고 유쾌하게 화제를 끌어냈고 오빠의 엄마의 웃음도 끌어냈지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머리가 하얗게 된 내 옆에서 말이죠. '어머니~' 소리가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내가 평생 그분을 부르게 될 그 세 글자는 언니 입에서 먼저 여러 번 자연스럽게 나왔죠. 그날 나는 단 한 번도 입을 떼지 못했던 그 단어 말이죠.


한국에 와서도 우리는 자주 만났어요. 언니의 결혼식에는 일본 중국 미국 친구들이 참석했지요. 언니는 나와 오빠를 신혼집에 초대해 삼겹살을 구워 주었어요. 남편을 옆에 두고 자꾸만 오빠에게 소주를 따라 주었고 어줍지 않은 사투리로 친한 척을 했지요. 대한민국 최고 미녀 배우와 결혼한 배우를 닮았던 언니의 남편 얼굴이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나요. 술을 마시면 엄청 빨개진 얼굴로 웃던 모습도요. 남편은 알고 있나요? 한국에 와서도 언니가 나를 불러낼 때마다 다른 남자도 함께 불렀다는 걸요. 남편에게는 소영이를 만난다고 하고 나에게는 비밀이라며 윙크를 하던 걸요. 세 시간의 시차가 나던 그곳에서 다른 남자들을 초대해 먹고 마시고 집에 보내지 않았던 걸요. 알고 계신가요?


내게 전화를 걸었던 그 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지요. 오빠에게 전화를 걸고 10분 후 내게 걸었더군요.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아요. 술 한 잔 하다가 예전 인연들 생각나 모처럼 전화번호를 찾았을 거라는 걸요. 정말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혼자 지내는 오빠에게 진작 자주 연락을 했겠죠. 오빠에게 걸고 나서 굳이 내게까지 전화를 걸진 않았겠죠.

추억에 젖어 목소리 듣고 안부 전하고 싶은 마음 이해해요. 이성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는 것도 알아요. 배우자와도 아는 사이인데 전화 한 통 걸 수도 있죠. 하지만요, 저는 싫어요. 나와 오빠 앞에서 술기운을 빌어 실은 자기가 오빠 좋아했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하던 언니의 솔직함이 싫어요. 소개팅을 해달라고 한 건 핑계일 뿐 오빠와 사귀어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웃던 그 웃음이 싫어요. 의도했든 아니었든 언니 들러리가 되었던 순간들이 싫어요.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갖고도 늘 더 많은 것을 원했던, 내가 가졌으면서도 혹여라도 빼앗길까 남모를 불안함을 떠안겨주던, 영어 이름조차 영국 여왕의 이름에서 따 왔던, 언니가 이제 저는 불편하고 싫어요.


몇 년 전 우리 부부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빠져나오자마자, 언니가 오빠에게 연락했던 그 타이밍이 싫어요. 오빠에게는 그때 언니 연락처를 지우라고 했었죠. 이번에 다시 저장을 해 놓으라고 했어요. 모르는 번호이니 무심코 받게 될까 봐요.


좋은 추억은 우리 그때 그 시절에 두어요. 꺼내보고 싶으면 부디 언니 혼자서 꺼내 보시길 바랍니다. 남의 남편에게 밤중에 연락해 같이 꺼내자고 하지 마시고요.




여우 같지만 곰 같은 언니에게

곰 같지만 여우 같은 씬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