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그린 드레스 1

여름 장면 넷

by 씬디북클럽

초록색 원피스 한 벌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 샀는지 기억이 없다. 고동색 바탕에 얇은 검은색 체크무늬가 있고 푸른빛 꽃들과 초록빛 잎들이 그려져 있다. 단추를 다 잠그면 단정하고 조신하다. 두어 개 열면 가슴 언저리에 살짝 손을 대며 고개를 숙여야 한다. 찰랑찰랑 녹색 원피스는 여름 여러 장면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 장면 1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그중에 천일 동안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전설 같은 세 가수의 콘서트에 가는 것은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중 한 명의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기대보다 행복했고 예상외로 북받쳤다. 가시지 않는 감정과 여운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막막하던 순간, 오랜 지기 K가 같은 시각 같은 공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듣고 싶었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가수를 언제부터 어떻게 왜 좋아하게 되었나. 최애곡은 무엇인가.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대는 무엇이었나.


“소영아, 너 지금 꼭 인터뷰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K는 고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답하고 웃으며 울컥했다. 오랜 시간 노래해 온 그의 모습에 감동했고 예전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서글펐다. 가수와 노래와 공연을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의 예전과 지금과 내일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K를 먼저 보내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이런 색깔을 뭐라고 부르나. 진달래보다는 짙고 장미보다는 옅은 K의 붉은 셔츠와 나의 초록 원피스, 나란히 앉은 우리는 여름을 향해 나아가는 한 그루의 꽃나무 같았다. 아직은 햇살이 싫지 않은 초여름 바람에 쇼트커트와 단발 그 중간 길이의 머리칼이 살짝 날렸다. 찰칵. 모처럼 마음에 든 사진을 카톡 프로필에 올렸다. 6월이 시작되었다.




# 장면 2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매번 답하기 힘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3초 이내로 답할 수 있다. 모든 책을 다 읽지는 않았고 읽은 책들이 다 나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작가 명단 위쪽에 기꺼이 올린다. 책을 좋아하는지 작가를 좋아하는지, 어쩌면 책과 작가를 그저 좋아하는 내 마음을 좋아하는지도.


드디어 직접 만날 기회가 왔다. 국제 도서 전이라는 행사도 처음, 그런 곳에 혼자 가는 것도 처음, 선착순 인원 안에 들기 위해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나도록 달린 것도 처음. 모든 처음의 순간들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절로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을 그려냈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 졌습니다. 매일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인회를 마치고 나면 작가님과 동기인 이한열 열사의 공간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앞으로의 행보를 늘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여러 번 준비하고 정리한 말들을 건넸다. 손에 쥔 펜의 움직임이 멈추고 검은 뿔테 안경 사이의 두 눈이 내게 와닿았다. ‘지그시’,‘그윽하게’라는 부사들은 글이 아닌 사람으로 내게 와 스며들었다. “그러시군요.”라고 했는지 “좋습니다.”라고 했는지, 아니면 “고맙습니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눈빛과 표정이었는지는 확연하다.


토요일 오후의 기념관은 고요했다. 이어 들른 캠퍼스는 한산했다. 작가와 이한열 열사와 윤동주 시인이 거닐었을 그곳을 조용히 걸었다. 모자도 양산도 챙겼지만, 햇살을 오롯이 맞고 싶어 가방 안에 그냥 두었다. 영화에서 본 대학 정문에서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를 읽었고 그 시간과 더 이전의 시간을 상상했다.


초록색 잎사귀로 뒤덮인 건물에 도착했다. 연두보다 짙고 초록보다 푸르른 학생 한 명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좋아하는 마음과 기억하는 마음을 연연히 담으며.




# 장면 3


이런 글을 쓰고 싶었고 저런 모습을 닮고 싶었다. 아무도 몰래 나만 알고 싶은 그를 다른 이들에게 많이 알리고도 싶었다. 경애의 마음 중 내 것이 가장 컸으면 좋겠고 내 마음을 그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마트에 드러누워 떼쓰는 아이처럼, 그를 향한 마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욕심쟁이였다.


오래 망설이고 고민하다 건네는 부탁과 소식이, 생각 없이 당돌하게 나서는 치기와 부담으로 도착했다니.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뿐인데 글로 읽는 그의 생각이 서운했다. 나의 마음과 다른 것뿐인데 가 닿지 못한 내 마음이 서글프고 서러워 한참 울었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컸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 저녁의 도서관 옥상에는 아직 여름이 남아 있었다. 이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모습을 알기에 미리 감동했다. 처음 본 사람도 여러 번 본 사람도 진심을 담는 그의 모습에 또한 감동했음이 느껴졌다. 초록색 두꺼운 소설에서 고른 키워드가 담긴 연둣빛 봉투. 하나를 골라 돌아가며 낭독하는 시간, 오후의 햇살은 저녁으로 사라져 가고 이내 달빛이 공간을 비추었다. 반짝이는 알전구와 이름 모를 빨간 꽃도 그 시간을 함께 누리고 있었다.


“먼 길 와주어 고마워요.”


참았던 눈물이 끝내 흘러내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마음이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 책 사이에 끼워둔 연둣빛 봉투를 꺼냈다. 초록색 색연필로 쓴 두 글자는 ‘마음’이었다.

(마지막 단락의 두 번째 문장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인용했습니다.)




# 장면 4


“8월은 초록색이죠!”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에는 드레스 코드가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순서도 규칙도 없이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정하곤 했다. 이번 모임의 색은 초록이었다. 새 원피스를 하나 살까 하다가 어울리는 리본 핀 하나만을 샀다. 갈색과 초록이 들어간 옆으로 매는 가방은 그만이었다.


나에게 새벽 기상은 성공한 CEO들만 하는 먼 나라 딴 세상 이야기였다. 코로나로 온종일 북적이던 집 안, 우연히 일찍 깬 새벽은 고요한 평온 그 자체였다. 새벽을 열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필사하고 긍정 확언을 나누는 동안, 나만의 새벽 기상은 모두의 미라클 모닝이 되었다.


기적같이 만난 언니와 동생, 우리는 서로에게 ‘새벽 여신’이라는 조금은 간지러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 시 읽어 볼까요?”

“너무 좋다!”


이걸 먹자, 이곳에 가자, 이 전시를 보자, 이 책을 들고 만나자, 아니면 그냥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누구든 하자고 하면 모두가 기쁘게 응한다. 직장에 육아에 바쁜 일상을 쪼개고 아껴 만나는 시간은 3시간 남짓. 웃고 떠들고 말하고 듣다 보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는 순간이 된다.


새벽 동생의 생일을 미리 축하하며 함께 읽고 있는 책 탑을 쌓았다. 미리 정하지 않고 자리 잡은 카페는 ‘오설록’이었다. 녹차 빛이 어우러진 음료와 케이크를 맛보며 우리는 초록색 꽃이 되었다.


알게 된 지 고작 2년이 넘은 언니 동생들이다. 쉽지 않은 한 달에 한 번 만남은 얕지 않은 공감과 경청의 순간들로 쌓여가고 있다. 사는 곳과 삶은 달라도 몸과 생각이 바르고 아름다운 ‘여신’으로 함께 하길 기대한다. 다른 색으로 만나 함께 피어날 다음 계절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