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히말라야는 무엇인가요

'여성, 진화' 책구름 출판사 강연을 듣고

by 씬디북클럽


이틀 내내 생리혈을 콸콸 쏟았다. 이틀 전에는 이른 첫눈이 폴폴 내렸다. 이불속 온기에 온몸을 맡기고 싶은 계절. 귤껍질을 까 알맹이만 쏙 입에 넣으면서 읽다 졸다를 반복하고 싶었던 주말, 당연히 그러지 못했다.


잡곡을 섞어 밥을 짓고 부침가루를 묻혀 삼치를 구웠다. 타타타타타 화르륵, 시판 양념장을 넣고 바지락 순두부를 끓였다. 장 보고 재료 손질하고 굽고 끓이기를 반복했다. "와서 밥 먹어!" 비록 10여 분 만에 끝나는 세끼 식사이지만 네 식구가 함께 하는 유일한 주말 식탁.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육아는 끝났지만,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는 육아(라고 쓰고 '사육'이라 읽는다)는 끝이 없다.


싫은 소리는 듣기도 싫고 하기도 어렵다. 오래 고민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지웠다 고쳤다를 반복했지만 싫은 소리는 싫은 소리일 뿐이다. 이미 뱉은 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주워 담을 생각도 없다. 언젠가 후회할지라도 지금 나의 생각임에는 분명하니까. 그럼에도 내내 마음이 쓰이고 신경도 쓰였다. 반주 삼아 털어 넣은 한 잔도 쓰기만 했다.






4:44든 5:55든 알람 맞추기를 그만둔 지 열흘이 지났다. 기상 시간 인증만 하고 도로 누워 자는 주제에 새벽 기상이라니. '그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대단해요.' 칭찬에 뜨끔한 지 오래다. 밤이 길어진 탓, 새벽 라방을 안 하는 탓, 내가 일어나면 남편도 따라 깨는 탓, 온통 탓만 했다.


sns 1일 2 피드도 그만두었다. 책과 일상에 관련되어 쓸 내용을 고민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좋아요 개수에 연연하고 틈만 나면 인스타 앱을 습관처럼 누르는 것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시다니 멋져요.' 감탄과 탄복을 받아 마땅한 독자, 나는 절대 아니었다.


예전에 방송된 '효리네 민박'에서 이상순과 이효리의 대화가 떠올랐다. 보이지도 않는 의자 밑 매무새를 살핀다고 누가 알아주냐는 효리의 말에, '내가 안다.'라고 상순은 대답했었다.


새벽 기상을 한다고 읽고 쓰고 올린다고 누가 알아주나. 내가 안다. 남들이 뭐라든 나의 속도로 나의 결로 멈추지 않고 그냥 해나가면 되는 것도 내가 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 보여주기 식으로 주먹구구로 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안다. 내가 알든 알아주든 모든 것에 싫증이 났다. 나는 어쩌면 조금 지쳤는지도.


재작년과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다음 해를 계획하느라 분주했다. 소설 모임과 원서 북클럽의 선정 도서를 적었다 지웠다 행복한 고민을 하고 또 했다. 올해의 나는 계획한 것들조차 망설이고 있다. 나는 어쩌면 조금 많이 지쳤는지도. '갱년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책을 낸 사람, 잘 쓴 글로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낸 사람.


내가 생각하고 있던 소재로 글을 쓰고 책을 낸 사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소재로 글을 쓰고 책을 낸 사람, 좋은 글로 그 출판사에서 책을 냈고 곧 낼 사람.


2023년 가을의 나에게, 가장 부럽고 샘나고 질투 나는 사람들이다.


가장 부럽고 샘나고 질투 나는 그들이 기획하고 진행하고 참여하는 줌 미팅 자리였다. 부럽고 샘나고 질투 나는 건 사실이지만, 알고 싶고 궁금하고 배우고 싶은 것 또한 진심이었다. 뱅글이 안경과 화장기 없는 얼굴로는 좀처럼 화면을 켜지 않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힘을 싣고 싶었다. 일요일 오후 3시의 줌 화면 속에 나와 같은 마음의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아, 화면을 켜지 말 걸 그랬나.

앞선 두 차례의 강연을 듣지 못해 아쉬웠었다. 앉은자리에서 완독한 ‘도쿄 윤카페’의 작가님도, 오늘 참여한 두 작가님도, 진행을 맡은 책방지기님도, 기획한 편집장님도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닮고 싶은 글과 삶,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여정과 용기. 부러우면 지는 거다. 내내 지고 지고 지는 중이었다. '늘 진다는 것은 좋은 일'(마크 헤이머, 두더지 잡기 中)이라는 늙은 정원사의 말은 아름다웠지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세 보이지만 다정한 40대 작가님, 귀여워 보이지만 센 50대 작가님.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언어의 향연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필기에 집중하던 중 고개를 들고 발표자 화면을 켰다. 자주 보던 눈빛이 흔들리고 자주 듣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덜컥 눈물이라도 쏟으시면 어쩌나 하자마자 내 눈물부터 쏟아질 지경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눈을 비비는 척 닦아내고 다시 필기에 집중했다. 펜을 잡은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은 더 흔들리고 있었다.


50대의 귀엽지만 센 작가님이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만의 히말라야를 이야기하던 순간이었다. 끝도 없는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것, 나아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멈추지 않는 것, 소박하지만 고유한 언어로 나만의 언어를 찾는 것. 그럼에도 지치고 힘이 들고 외로운 순간이 가득하다고 이야기하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들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에 바삐 움직이던 펜이 멈춰 섰다.


나는 지금 멈추어 있는데. 새벽 기상도 읽기도 쓰기도 다 내려놓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겠는데. 다시 시작할 길을 잃었는데. 지금은 지치고 힘들고 외롭지만 그래도 50대가 되면 괜찮겠지, 함께 하는 이들의 다정과 다정과 다정을 충전받으며 나도 언젠가는 그대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날들이 오겠지. 그대가 그 말씀하시면 저는 어쩌라고요. 40대 후배는 어쩌라고요. 흔들리는 손과 마음은 갈피를 잃어가고 있었다.


“멈추고 돌아보고 잠깐 숨 고르기를 해도 괜찮아요.”


내 마음을 들켜버렸다. 화들짝 놀랐다. 눈은 동그래졌고 목구멍에서는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 괜찮아. 나는 지금 잠시 숨 고르는 중이야. 멈추면 안 되는 건 없어. 멈춰 서도 괜찮아. 잠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돼. 어디로 어떻게 다시 걸어갈지 내 지도와 내 한계를 살펴보고 결정하면 돼. 그러면 돼. 뭐든 다 괜찮아.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주문처럼 반복했다. 위로는 부족하고 모자랐다. 흐르는 눈물을 들키기도 싫었다.





나의 히말라야는 질투심이다.


유명하고 화려한 사람들이 부러운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들을 해내고 이뤄내는 사람들이, 내가 내지 못하는 용기를 내어 도전하고 실행하고 결과물로 증명하는 이들이 몸서리치게 부러웠다. 그들에 비하면 나의 용기와 도전과 실행은 초라하기만 했다. 결과물도 보잘것없었다. 아니, 결과물이라고 보일 것들이 하나도 없 것만 같다.


공저로 출간한 책으로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혼자만의 책을 쓰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내가 쓰는 걸 누가 궁금해나 할까,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책이 될까, 돈 주고 사서 읽고 싶을까, 걱정부터 선결제했다.

1년 멤버를 모집한 소설 모임 참여율 저조로 문집 제작 계획을 접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에게 뭐가 문제였을까, 고민에 빠졌다.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들이는 일에 대한 자부심은 흐릿해져 가고 자괴감만 자라났다. 혼자서만 영차 애쓰는 줄다리기는 미없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시험 기간도, 가까운 고등학교도 모르는 나는 자격미달 엄마 같기만 했다. 저들 스스로 알아서 했다며 다 키우고 잘 보낸 선배엄마들의 곧게 어깨를 보며 나의 등은 더욱 구부러지기만 했다.





'당신의 히말라야는 무엇인가요?'라고 제목부터 정하고 정신없이 써 내려간 글의 끝을 '나의 히말라야는 질투심이다'이라고 현재형으로 맺고 싶지 않다. 지금 나의 감정이 '질투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감정을 부둥켜안고 놓지 않을지, 서서히 내려놓을지, 내려놓고 가만히 오래 바라볼지,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또 다른 숙제가 되었다.


모범생인 나는 숙제를 해내려 또다시 애쓰겠지만, 마감 기한을 넘겨도 괜찮을 거다. 진화나 진보같이 대단하고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아니, 진정 괜찮다.


'너는 너만의 히말라야를 오르는 중이구나.'


나 자신에게 말해줄 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도 한 번 가보자! 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고비씩 넘기다 보면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그 벌어진 틈으로 숨도 쉬고 새로운 공기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드러나야 합니다. 나 여기 있다고. 나도 여기 있다고.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는 데서 나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편집장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