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수 2월 19일 무렵
올해도 사진을 찍었다.
몇 해 전부터 행궁동의 사진관에서 흑백 사진을 찍어오고 있다. 매년 4월, 결혼기념일 즈음에는 남편과 함께 찍는다.
"자, 살짝 웃어 보세요. 아이, 부끄러워."
이제는 나를 알아보시는 사진사 님의 포즈 연출에도 자꾸만 쑥스럽다. 치아 교정 전에는 화난 사람 마냥 입을 꾹 다물곤 했는데, 이제는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스스럼없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짓는다. 옆모습보다는 정면이, 앉은 자세보다 서 있는 편이 조금은 나은 것 같다. 어째 올해 사진은 유독 동글동글. 체중 감량의 절실함을 사진 속에서 절감한다.
어느새 나만의 소소한 봄 이벤트가 된 흑백 사진 촬영. 카톡 프사를 바꾸었다. 사진 속 빈 공간에 '2026, 마흔일곱 번째 봄'이라고 속으로 적었다. 봄이 정말로 시작된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기다린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봄이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기다릴 수 있지만 그 마음은 어쩐지 혼자에 가깝고, 함께 기다리기에 좋은 것은 역시 봄. p36
계절을 들여다볼수록 오랫동안 잊고 살던 그 감각을 되찾고 싶어진다. 절기는 공부해서 익히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며 내 곁의 계절을 감각하는 일이다. p40
두쫀쿠 말고 봄동 비빔밥이라는데, 아직 못 먹어 봤다.
남의 편과 다툰 다음 날 아침 일찍, 혼자서 산책을 나섰다. (싸운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새 운동화를 신고 첫새벽의 성곽길을 걷다 보니 춥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엉킨 실처럼 복잡했던 머리가 느슨해지고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설마 이렇게 일찍, 일요일 아침부터 문을 열었을까, 하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많은 가게들이 하루를 열고 있었다. 족발을 삶아내고 떡을 쪄낸 김이 모락모락 좁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모퉁이 채소 가게에서 봄동을 발견했다. 한 포기에 2천 원, 두 포기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조물조물 매콤하게 잘 무쳐 봐야지, 솜씨 없어도 진짜 맛있다며 SNS에서 다들 난리니까, 계란 프라이 두어 개 올려서 쓱쓱 비벼 줘야지. 밉기만 했던 남의 편 입에 넣어줄 밥 생각을 하다니, 그야말로 물로 칼 베기네.
나에게 봄은 이것으로 온다, 말할 수 있는 봄나물을 하나쯤 품고 사는 건, 새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 있다는 걸. 누가 뭐라 해도 봄은 그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p42
"48주년 결기 축하합니다."
"어머, 그런 거여. 딸이 좋네. 이런 것도 챙겨주고."
달력의 2월 19일 아래 작은 글씨로 '우수'라고 쓰여 있던 걸 이제야 알았다. 갑천 씨와 혜옥 씨의 결혼식 날짜. 1978년의 겨울과 봄 사이, 스물여섯 신랑과 스물 하나 신부의 결혼식 사진을 들쳐 본다. 진달래빛 한복을 입은 월미도 신행 사진도 찾아본다. 젊다 못해 어리고 어린 사진 속 부부의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사람을 먼저 보내고 남은 사람이 만나게 될 수십 번의 봄을 상상이나 했을까.
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아니라 늘 '이미'와 있다. 입춘부터 곡우까지, 모든 모습이 다 봄이다. 그걸 알게 되면 봄이 짧다는 말 대신 눈앞의 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길게 펼쳐진 봄의 화폭에서 오늘에 해당하는 그림을. p44
□ 이른 봄나물을 찾아 먹는 것으로 봄이 온 것을 기념해 보기
□ 올해 계절마다 어떤 제철 음식을 즐기고 싶은지 적어보기
□ 우수의 동물, 수달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 찾아보기
우수
雨 비 우 水 물 수
2월 19일 무렵
눈이 녹아 비가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