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경칩 3월 5일 무렵
모처럼 일찍 집을 나섰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를 관람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평일 오전의 고즈넉함을 기대하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던데, 잘 몰라서 도통 안 보였나.
미술에는 크게 흥미도 재미도 없어왔다. 그래도 유명한 그림이라고 하니, 무려 MET에서 온 진품이라고 하니, 굿바이 할인이라고 하니, 꼭 보고 싶었다. 욕심내지 말고 정우철 도슨트 영상에서 소개된 10개 작품만 딱 보고 오자고 맘먹고 나선 길이었다.
화가의 고뇌와 고민과 고심과 고생으로 덧칠해졌을 많은 작품들이 수백 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무지렁이 관람객 눈에도 그 많은 감정들이 보이는 듯하다고 착각을 해 본다. 무수한 계절과 풍경과 공기와 사람을 담아낸 당신의 열정 앞에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도 솟아나는 중이라고.
가장 오래 발길이 머문 것은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였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그림은 피에르 오귀스트 코트의 '봄'이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어린 연인의 설렘과 아름다운이 폭발하는, 커다란 크기의 작품 앞에서 나의 계절도 이미 당도한 걸까. 봄이 오기 전에, 아니 내가 먼저 봄에게 다가가리라.
절기가 관찰과 기록의 결과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벽에 걸어둘 시계도 달력도 없던 시절, 옛사람들이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계절의 흐름을 가늠했다는 게 잊혀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p52
봄맞이 대청소를 또 미루었다.
책장도 옷장도 정리를 해야지 하면서 그대로 널브러졌다. 까무룩 선잠을 자고 일어나 청소기를 꺼내 들었다. 큰 맘까지 아닌 작은 맘만 먹어도 창문을 열고 싶은 계절. 집 앞으로 노란 프리지어 두어 다발도 배달할 수 있는 세상. 절반은 청소를 마친 식탁 위에, 나머지 절반을 버들반 교실 창가에 잘 놓아두었다. 곧 들이닥칠 어린 봄들에게 노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지.
대청소는 또 미루었지만 봄 마중만큼은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
청소는 결국 빈자리를 만드는 일. 매년 이맘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듯 바닥을 쓸고 닦고, 화분을 옮기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나눈다.
봄에게 앉은자리를 내어주어야지. p55
경칩
驚 놀랄 경 蟄 겨울잠 잘 칩
3월 5일 무렵
천둥소리에 놀라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