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7 안경

by 씬디북클럽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월요일 아침입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드디어 내 세상입니다. 좋아하는 라디오 앱을 열어 볼륨을 크게 켭니다. 소파까지 움직이며 청소기를 돌립니다. 귀찮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걸레질도 합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소파에 앉으려는 찰나, 아차차, 아직 청소가 덜 된 공간이 남았습니다. 아이의 방, 판도라의 상자를 열 시간입니다.


닫혀 있는 아이의 방문을 엽니다. 킁킁, 얼마 전까지는 홀아비 내음이 나는 것 같았는데, 어디 보자, 달착지근한 냄새가 납니다. 목캔디, 젤리, 사탕, 바싹 마른 장미까지, 아, 이러다 어딘가 다른 생명체가 동고동락 중인 건 아닌지 심히 염려됩니다.

자기 방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만 한집에 사는 이상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매일은 못하지만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은 금기를 깨고 아이 방을 정리합니다. 발 디딜 틈 없는 닥을 디뎌 살금살금 청소를 시작합니다.


널브러진 옷가지를 개고 머리카락을 치우다가, 빈 상자 한가득을 발견합니다. 영어로 쓰여 있는데, 응? First Love? 한 달에 한 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죠?


당황스레 뻗어 나가는 오만 가지 생각을 잠시 가라앉히고 다시 읽어보니, 한 달 착용 컬러렌즈 상자였습니다. 뭐 이리 의미심장한 제품명과 그림인지요. 요새 애들 우리 때랑 많이 다르다, 열린 부모가 되고 싶었건만, 한 번 철렁한 가슴이 도통 올라오지 않습니다.



First Love 와 가위질 당하는 하트라니.. 오해할 만... 하지 않나요?


시력이 정말 몹시 대단히 심각하게 좋지 않은 엄마를 닮을세라, 아이들 시력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블루베리를 먹이고 움직이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절대 못 보게 했습니다. TV도 멀리서 책도 환한 곳에서 신신당부를 했지요. 첫 안과 진료를 서울대병원까지 찾아갔습니다. 안경은 어쩔 수 없더라도, 성인이 된 후에 라식 라섹 수술을 가능한 정도로 유지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실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소영아, 저기 너희 아빠 아니야?"


일곱 살 여름 정도로 기억합니다. 동네 친구 지홍이가 가리킨 곳에는 퇴근한 아빠가 걸어오고 있었지만, 저는 한참 후에야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급격하게 나빠진 시력으로 일곱 살 가을부터는 모든 사진에 안경이 등장합니다.


"소영아, 렌즈 한 번 껴 볼래?"


이웃집 아줌마의 권유로 소프트 렌즈를 착용해 보았습니다. 콩나물 껍질 같은 매끈매끈한 감촉이 생생합니다. 이걸 어떻게 눈에 넣는담, 했지만 두껍고 무거운 안경 없는 세상은 천국이었습니다. 중1 때부터 렌즈를 착용했습니다. 나름 꼼꼼한 성격이라 세척도 보관도 신경 써서 했습니다.


"너, 눈 이렇게나 나빴어?"


고등학교에 와서는 장시간 착용에도 눈에 피로가 덜 한 하드 렌즈로 바꾸었습니다. 새벽부터 렌즈를 끼고 자정 넘어 렌즈를 뺐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두껍고 무겁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습니다. 내 눈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눈이 이렇게나 나쁘냐는 소리를 들으면 괜스레 움츠러들었습니다. 자주 눈이 피로했지만, 렌즈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 좀 모른 척 해 줄래?"


고3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새벽부터 렌즈를 끼고 야자 시간이면 렌즈를 빼고 안경을 착용했습니다. 안경 두껍냐는 말도, 눈 나쁘냐는 말도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채 차단했습니다. 짝사랑하는 남자애를 마주칠까 몰래몰래 피해 가며 귀가 스쿨버스에 올랐습니다. 눈의 편안함을 얻고 몸과 마음의 자신감을 잃은 시절이었습니다.


"최대한 서서히 나빠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녹내장 진단을 받은 지 2년이 넘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밤에 자기 직전 안압 낮추는 약을 눈에 넣습니다. 아침보다 특히 밤에 약을 넣으면 눈이 빠질 듯이 아픕니다. 영화 '관상'의 말미에 수양대군이 신하들을 시켜 송강호의 눈을 칼로 겨누는 장면이 매번 떠오릅니다.


친정 엄마 혜옥 씨가 본인의 눈을 주겠다는 말은 슬프도록 감동적이었지만, 그 눈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저만큼 시력이 나쁘지 않음에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아주 가끔, 영영 앞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를 언젠가를 상상합니다. 그때까지 좋아하는 책을 원 없이 읽고 뭐든 많이 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많이 보고 기억 속에 담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길,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길 바랍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