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에게도 봄은 흐르고

#8 벚꽃

by 씬디북클럽




봄이다. 4월이다.


매년 닮은 듯 다른 분홍빛이 핸드폰 사진첩을 가득 채운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작년의 내가 그랬듯이, 내년의 내가 그러할 예정이듯이.


주말 비 예보를 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 계절에 한 열흘 동안만 입을 수 있으려나. 좋아하는 분홍빛 재킷을 챙겨 입었다. 분홍빛을 배경 삼아 분홍빛 사진을 찍어야지. 좋아하는 계절에 걸맞은 분홍빛 마음들을 차곡차곡 쌓아야지.


평일 오후 벚꽃길은 한산했지만 불금의 벚꽃길은 인파로 가득했다. 출근 전 빠른 걸음으로 낮벚꽃을, 퇴근 후 느린 걸음으로 밤벚꽃을 즐겼다. 단돈 100원도 안 드는, 오직 나만을 위한 4월의 호사.




같은 날 다른 느낌 (수원 화성 화홍문 배경으로)






고3에게도 계절은 흐른다.


긴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말로만 듣던 '3모'(3월 모의고사)가 지난주에 있었다. 3모 성적이 그해 수능 성적이라더라, 불수능일지 물수능일지 그때 판가름 난다더라, 따라서 3모 망하면 수능도 망한다더라... 는 온갖 낭설들에 초보 고3 엄마는 나름 긴장된 하루를 보냈다. 금쯤 몇 교시일까, 수능 도시락 연습 겸 도시락을 싸줄 걸 그랬나, 얼마나 떨릴까, 11월의 어느 목요일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게 될까.


"엄마, 3모 망했다고 다 망한 건 아니라고 말해 줘."


귀가한 아이의 말에, 나오려던 한숨을 입술 사이로 비집어 넣고선 큰 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3모가 끝나자마자 4월 내신 준비가 시작되었다. 수학 학원을 그만둔 아이는 윈터 스쿨을 진행했던 영어 학원에서 수업을 듣기도, 자습을 하기도 했다. 집 근처 스카를 등록해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내신으로 승부 보기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 일단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아이의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에 태우러 시동을 걸고 끄는 일은, 오후 쪽잠을 루틴으로 삼아야 할 정도였다. 아이만큼은 아니겠지만, 엄마도 굉장히 졸리고 피곤하다.






"와, 우리 아파트 벚꽃 맛집이네. 여기 예쁘게 폈네. 올봄엔 꽃구경도 못 갈 텐데, 차창 밖으로라도 좀 봐봐."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후에 애들이랑 공원에 사진 찍으러 가기로 했어."


고3이 무슨 꽃구경이냐,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정작 고3 엄마인 나는 낮밤으로 벚꽃 엔딩과 굿굿바이하러 바지런을 떨면서, 아이는 꽃구경 한 번 못 가게 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고3도 눈이 있고 코가 있을 텐데. 온통 분홍빛 세상 속 향긋한 꽃 내음에 무슨 수로 눈 가리고 코 막아 책상에 붙여 놓을 수 있으랴.

말은 삼켰지만 그래도 공부할 시간에 놀러 가느냐는 무언의 뉘앙스를 읽은 모양이다. 아이는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지 아빠를 닮아 털털한가 싶다가도 이럴 때면 나는 닮아 예민한가 싶기도 하다. 아이 눈치를 보는 수밖에 없다.


등교 차량 기사 모드로 대표님 모시듯 안전하게 도착했다. 아이는 인사 없이 세게 차문을 닫았다. 사이드미러로나마 심사를 살피는 순간, 친구를 만났는지 아이의 굳었던 얼굴이 막 나온 찹쌀떡처럼 말랑해졌다. 집에서의 무표정이 무색할 만큼, 아이 얼굴은 꽃처럼 환히 피어나고 있었다.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 비상 깜빡이를 껐다.




벚세권 아파트 단지 곳곳 벚꽃들, 사진으로 다 안 담긴다





서울에도 광주에도 프라하에도 봄은 있었듯이, 나의 수험생 시절에도 봄은 있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탓인지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워 '서베리아'라고 불리던 그곳에도 봄은 찾아왔다. 두껍던 교복 코트를 벗고, 스타킹 없이 양말만 신을 수 있는 계절이 오면 학교 곳곳에 개나리와 목련이 한가득 피었다. (벚꽃 기억은 잘 안 난다.) 교화인 장미는 아직 꽃을 피우기 전, 노랗고 하얀 배경으로 친구들과 함께 모여 사진을 찍곤 했다.


삐삐 시절에 사진을 찍는 방법이라곤 집에서 가져오는 '아빠 카메라' 뿐. 당시에는 고가의 가전제품이라 자식들에게 쉽게 내어주지 않았을 그것을 누군가 학교에 들고 오기라도 하면, 그날 점심은 곳곳에서 포즈를 잡았다. 똑같은 교복에 비슷한 포즈 속에서도 다채로운 표정이 묻어났다. 여드름 범벅에 턱선을 상실한 고3 시절에도 모두들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 잘 다녀왔어? 엄마도 사진 보고 싶어."

"보여 줄 거 없는데. 이거 하나만 봐. 뒤로 넘기지 말고."


아이가 건넨 폰에는 예닐곱 명의 여고생이 담겨 있었다. 똑같은 교복에 비슷한 포즈 속에서도 우리 아이만 활짝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서 보고

온 벚꽃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3에게도 계절이 흐른다. 봄은 오고 또 지나갈 것이다. 대학 가면 예뻐지고 살 빠진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지금, 대학 가서 보는 벚꽃이 예쁠 거라는 말도 구겨 던져 버린다. 지금은 지금의 봄이 흐르듯, 그때 가면 또 그때의 봄이 흐를 것이다. 조금 더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모녀 사진 한 장을 담을 수 있는 봄이 머지않았길 바란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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