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색도 핑크색도 아닌 어정쩡한 색상의 상의 가운을 입었다. 두 쌍의 리본을 허투루 맸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 내 이름이 적힌 차트를 들고 정해진 코스에 따라 오르락 내렸다. 소변을 받는 종이컵과 기다란 면봉 두 개가 달린 키트(!)도 받았다. 얼핏 보면 공유를 닮은 남자 직원이 나의 왼쪽 팔을 잡고 따끔한 맛을 보여 주었다. 키와 몸무게 혈압을 쟀다. 오른쪽 귀인지 왼쪽 귀인지 아니면 밖에서 나는 소리인지 이제 가는 귀도 먹는 걸까. 왼쪽 렌즈가 덜 닦여 뿌옇게 되었는지 양쪽 눈의 시력 차도 많이 났다. 입도 벌렸고 두 다리도 벌렸다. 말랑말랑한 호떡 반죽을 얹어 이름 모를 그 도구로 지그시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다지 봉긋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처지지도 않은 나의 소중하고 말랑한 두 가슴도 위에서 옆에서 납작하게 눌러졌다.
몇 번의 검진 경험 상 길고 짧은 대기 시간을 예상해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도 되고 이동 경로가 복잡한 만큼 폰과 함께 손에 착 들고 다니기 좋은 사이즈. 그리고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 바로 그 책이었다.
배추가 김치가 된 사연,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의 소주 오르골, 앱솔루트 보드카와 금성 냉장고, 노래방 리모컨으로 운전하는 장면... 나는 이번에도 똑같은 장면에서 킥킥댔다. 대기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건강 검진을 마치고 나오는 길, 갑자기 뭔가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멸치 국물을 오래 우려낸 파티 누들을 먹을까, 살아 있는 숙주를 뜨거운 국물에 푹 담갔다가 면과 고기와 함께 한 입 넣는 쌀국수를 먹을까. 짧은 고민 끝에 뭔가 더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다. 나 오늘 피를 네 통(!)이나 뽑았잖아! 선지해장국, 너로 정했다!
"해장국 하나요, 먹고 갈게요."
단지에 담긴 두 종류의 김치가 나왔다. 숭덩숭덩 썬 큰 깍두기 세 개를 집어 다섯 살 아이 먹일 사이즈로 잘게 잘랐다. 오늘 아침에 담근 게 분명한 숨이 덜 죽은 겉절이는 흰 부분과 이파리가 적당히 있는 좋아하는 부위를 덜었다. 단무지 선지 잘게 썬 청양고추 고기를 찍어먹을 고추냉이 간장도 조르륵 자리를 잡았다.
보글보글 뚝배기가 도착했다. 인증샷을 찍어야지. 보글보글 끓는 동영상 3초. 상차림 한 컷. 메뉴와 왠지 딱 맞는 책과도 한 컷. 국물부터 한 숟갈 떠 넣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당연히 쌓이지도 않은 숙취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흐물흐물해질 대로 흐느적대는 우거지는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렸다. 갈빗대에 붙은 살점이 젓가락을 대자마자 분리되었다. 적당한 비계가 붙은 고기 한 점을 집어 고추냉이 간장에 찍었다. 이거거든!
그리고 선지.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시장에 갔다가 마음의 준비 없이 대면한 선지와의 첫 만남은 충격과 공포 그 이상이었다. 뚜껑 없는 커다란 알루미늄 통에 담겨 있는 그 버얼겋고, 아니 뻐어어얼겋고 물컹거리는 것을 내가 그동안 먹어 왔다니. 콩나물이랑 시래기랑 된장이랑 넣어 끓여 준 그 국물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니. 생경한 식감이지만 먹을만 했던 그것의 조리 전 모습이 바로 저것이었다니. 다음 날로 선짓국을 끊고 순댓국으로 갈아탔던 국민학교 뽀시래기 소녀의 기억은 꿈엔들 잊힐리야.
말캉한 그것을 다시 대면했다. 그것도 자발적 만남이었다. 젓가락으로 잘라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한 입, 겉절이와 한 입, 깍두기 무와 한 입... 오늘은 예전에 친했지만 한동안 거리를 두었던 선지와 다시 가까워진 날이다. 차가 없었다면 '밖혼술'을 했을지도 모를 날이다.
모처럼의 '밖혼밥'이었다. 앞에 앉은 이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이, 동행한 이의 먹는 속도에 맞출 필요도 없이, 혼자서 천천히 국물과 고기와 김치와 밥을 꼭꼭 씹어서 먹었다. 꾹꾹 눌러 담은 공깃밥의 마지막 밥알까지 정교한 젓가락질로 집어 먹자마자 약 두 시간 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작년보다 3kg 정도 체중이 더 나가시네요.
허리 사이즈도 4cm 느셨고요."
체중에게 인지 허리 사이즈에게 인지 존칭을 해 줄 만큼 긍정적인 결과는 아닌데. 안 되겠다. 어서 집에 가서 초저녁에 집혼술을 해야겠다. 일찍 먹고 밤에 안 먹으면 괜찮을 거야. 줄어든 체중과 허리 사이즈는 내년의 내가 알아서 해 줄 거야.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