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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Oct 15. 2016

사려니숲엔 브라우니가 있다

"브라우니 같다. 맛있겠다."


제주 사려니숲길의 흙은 진한 초콜릿 빛깔이다. 칼로 네모를 그어 퍼내면 딱 브라우니가 될 것 같다. 구수한 흙냄새가 흡사 진한 다크 초콜릿의 그것 같다. 사려니숲길은 그 이름의 뜻만큼 신성한 기운이 감돈다. 희미한 안개가 마치 갓 무대에 오른 여배우의 극적인 장면 연출을 위해 흩뿌려놓은 안개효과 같다. 우리는 그 황홀한 길을 사뿐사뿐 걸었다. 


자존감 갑인 나는 언제나 내 생일을 어떻게 자축할 것인가를 일찍부터 고민한다. 그 해에도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하러 오언니를 꼬셔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꼬심을 당해준 유부녀 오언니가 새삼 고맙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생일이지만 내가 특별히 여기지 않으면 정말 아무렇지 않은 날이 될까 나는 항상 정성을 다해 축하한다. 조금 유별나게 보이긴 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공기와 서울의 숲과는 조금 다른 풀냄새, 그리고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는 야생화들이 모두 나의 날을 함께 축하했다. 기분이 좋아 내가 발가벗고 걷고 싶다고 했더니 오언니는 다행히 나를 말려주었다. 


우리는 저질체력으로 인해 사려니숲길을 끝까지 걷지는 못했다. 아마 반도 못 걸었을 것이다. 다음에 또 오자 해놓고는 그 후로 그 숲을 다시 가보지 못했다. 다음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나도 그 숲도 몰랐을 것이다. 


살다 보면 단숨에 걸을 수 있는 길이 있고 몇 번을 걷고 걸어야 끝낼 수 있는 길도 있다. 한 번에 끝내지 못했다고 괴로워할 것도 패배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조금 훼손되긴 하겠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도 똑같이 매일 조금씩 훼손되고 상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며 오늘을 끝끝내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세월이 흘러도 나고 거꾸로 시간을 돌려도 나다. 나는 어디 가지 않는다.  


빨리 가려고 애쓸 필요 없다고 믿고 싶다. 제 아무리 뜀박질이 빠른 토끼도 방심하다 그 느린 거북이에게 진다. 그런데 뭐 인생길이 빨리만 간다고 좋은가? 그 끝에 누가 떡하니 서서 먼저 오는 사람에게는 상이라도 주나? 빨리 가기보다 나는 제대로 걷고 싶다. 이 길 하나하나를 만끽하면서 말이다. 거북이처럼 더디게 가도 내가 지나는 길에 어떤 들꽃이 피었는지 그 꽃에서 내가 밟는 흙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코를 들이밀고 킁킁 맡고 싶다. 혹여 같이 걷는 말동무라도 만나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사려니숲길을 찾아 걸을 작정이다. 그때엔 더 꾹꾹 그 브라우니 숲길을 밟고 마음으로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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