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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Dec 23. 2016

분홍 립스틱

할머니는 분홍 립스틱을 받고는 "이거 얼마짜리냐?"라고 되물었다

 

내가 " 4 ?"이라고 답하자  이렇게 비싼   왔냐며 자신은  번도 만원이 넘는 '루주' 사본 적이 없다며 토끼눈을 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셨다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지갑 대용의 복주머니를 꺼내  속에서 옥색의 브랜드조차   없는 '루주' 꺼내 보이셨다족히 10년은  보이는 비주얼이었다. "뭐야이거  갖다 버려." "이거 아직 쓸만한데  소리냐." 나는 "화장품 그렇게 오래 쓰는  아냐할머니 입술 썩는다 이제아이고!"라고 악담을 해댔다필요없다며 환불해 오라고 하셨지만 립스틱을 조물조물 만지시는 것을 보니 꽤나 맘에 드셨나 보다그래서  그냥 "환불 못해쓸라면 쓰고 말라면 말아생일선물 !"이라고 했다. "환불을  못해?" 따져 물었지만 할머니는 그제야  이긴  머리맡 거울을 가져다  립스틱을 조심스레 꺼내 입술에 발랐다늙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입술을 분홍빛으로 바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찡했다어짜피 할아버지 병간호로 발이 묶여 화장하고 외출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선물하기 잘했다 싶었다나는  어울린다고 다정하게 말하지 못하고 "아껴 쓰면  된다그냥 팍팍  사줄게."라고 했다

 

사실 할머니 생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쯤이었던  같은데.'하고 까먹고 있었다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날이 할머니 생신이었고 나는 해외여행 시마다 면세점에서 쟁여 두었던 고급 브랜드의 분홍 립스틱 하나를 꺼냈다나는 쟁여 놓고 쓰면서 왠지 할머니를 드리기엔 조금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내가 쓰던 립스틱들  가장 고가의 립스틱이기도 했다그래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밤에 나가서  사기도 귀찮았다

 

그리고 그렇게  분홍 립스틱이 내가 마지막으로 드린 할머니의 생신 선물이 되었다엄마아빠야 종종 할머니할아버지 생신에 용돈을 찔러 넣어 드렸던  같다나도 거기에  하나 담근  쳤다어렸을 때는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잔뜩 모아 할머니에게 선물하기도 했다수가 틀리면 망설임 없이 밥상을 뒤집던 할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할머니를 불쌍히 여겼나 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은  묻은 돈을 몽땅 할머니에게  드리다니  예나 지금이나 감성적이고 통이 크구나 후로 머리가 커서는 할머니 생신은  다이어리 속에 빨간 동그라미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잊혔다

 

할머니는 치매 걸린 할아버지 병시중을 들며 '아이고  팔자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요즘 유행이라는 황혼이혼을 추천했다야반도주하더라도  눈감아 주리라고 했다할머니는 나의 제안이 어이가 없었던지 피식 웃으며 " 늙어 빠져서 어딜가누가 받아는 준다냐?"라고 하셨다눈가에 쭈글쭈글 주름이 예쁘게 졌다 펴졌다팔십이 넘은 여자의 팔자에 다른 남자는  없었나 보다나는 준다고만 하면 넙죽 받을 텐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주시고 싶었던지 치매를 앓고  해를 넘기지 못하셨다매일 할아버지를 빨리 데려가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드리던 할머니는  누구보다 슬피 우셨다할머니는 겉과 속이  다른 여자다.

 

상중에 할머니는 눈물범벅인 얼굴이었지만 입술만큼은 분홍빛으로 빛났다아마도 할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에 멋모를 시절 시집온 소녀 때처럼 예쁜 얼굴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알면서도 나는 "할머니 새로 시집가도 되겠다."라고 놀렸고 할머니는 "망할 !"이라며 나를 혼냈다.

 

서울살이가 지겨웠던 나는 ' 돌아올게'라고 하고 바다 건너 이역만리 미국에 왔고 건강했던 할머니는  따위는 기다려 주지도 않고 얼마  할아버지를 쫓아갔다지겨운 양반이라고 했으면서  지겨운 양반을 따라 나한테 인사도 없이 그렇게 금방 가버렸다

 

지금  분홍 립스틱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내가 팍팍 쓰라고는 했지만 할머니 성격에 분명 아껴 쓰다 할머니 허리춤 복주머니 속에서 할머니와 함께 빛도 발하지 못하고 스러졌을 것이다 훗날하늘나라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날 때에 할머니는 그때  분홍 립스틱을 나에게 꺼내 보이며 "이거 좋더라아직까지도 많이 남았어."라며 말할 것만 같다

 

그래도 천국에서 그거 바르고 다른 할머니들한테 꿀리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이럴  알았으면 할머니께  비싼 '루주' 형형색색 사다 드릴  그랬다


<미주카톨릭문인협회 신인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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