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남편을 뒤늦게 사랑하게 되는 희옥의 이야기, 박범신의 신작 <당신>을 읽고 떠오르는 사람 둘이 있다. 바로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얼마 살지 않았지만 내가 경험한 가장 최악의 병은 치매였다. 아직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정신이 없던 할아버지는 가끔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할머니는 저 인간 빨리 안 데려가고 뭐 하냐며 나를 앞에 세우고 하소연하곤 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상경상도 사나이였던 할아버지는 언제나 병약한 사람이었다. 큰 수술도 몇 번 받아 배에는 커다란 꿰맨 자국이 있었다. 골골 백세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분이셨다. 할머니는 저 사람 어렸을 적에 똥통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 시크하게 대답하셨다. 마치 다 짊어지고 가겠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병시중을 들며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시크한 할머니의 시크한 손녀인 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요즘 유행이라는 황혼이혼을 추천했다. 야반도주하더라도 내 눈감아 주리라고 했다. 할머니는 나의 제안이 어이가 없었던지 피식 웃으셨다. 그런 할머니는 할머니 나이도 있으니 요양원에서 전문적인 도움을 받자던 자식들에게 이 사람 감옥소에는 못 보낸다고 성을 내셨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요양보호사가 할아버지를 씻기는 일도 할머니는 허하지 않으셨다. 지아비 벗은 몸을 어찌 남한테 보이느냐며.
할아버지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주시고 싶었던지 치매를 앓고 두 해를 넘기지 못하셨다. 매일 할아버지를 빨리 데려가라고 기도하던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슬피 우셨다. 큰 며느리인 우리 엄마와 장손인 내 남동생이 미국에서 날아와야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장례는 재벌가에서나 할 법한 오일장으로 치렀다. 끝까지 할아버지는 럭키가이였다.
긴 장례를 치르고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이나 가자고 했다. 여행 제목은 거창하게 할머니 돌싱 여행. 자의는 아니지만 타의로 돌싱이 된 할머니와 그렇게 서해 남해를 돌았다. 나는 이제 병시중 들 지아비도 없으니 잘생긴 할아버지 있으면 시집가라고 농을 쳤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미국 말 못 하고 운전도 못해 미국살이가 지옥살이 같았던 할머니는 죽어도 미국엔 가기 싫다고 했다. 서울살이가 지겨웠던 나는 '곧 돌아올게'라고 하고 이 곳에 왔고 건강했던 할머니는 나 따위는 기다려 주지도 않고 얼마 후 할아버지를 쫓아갔다.
내 눈엔 밑지는 장사였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결혼생활은 그래도 사랑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렇게 빨리 할아버지를 따라간 것도 다 사랑 때문이었나 보다. 어떤 사랑은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가능한 그런 것인가 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미화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중에 할머니를 천국에서 만나면 할머니에게 꼭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할아버지를 엄청 사랑했던 것이냐고.
할머니는 또 시크하게 '지랄, 사랑은 무슨'이라고 대답하겠지만 나는 그럼 사랑이었나 보다고 들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