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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Oct 08. 2019

여행 첫날, 짐을 잃어버렸다

강제 미니멀 라이프가 시작됐다

여행 첫날, 황망하게도 짐을 잃어버렸다. 


정확히는 짐을 잃어버림을 당했다. 우리 세 식구 - 나와 두 아이 - 가 8박 9일 동안 입고 신고 쓸 옷가지와 신발, 세면도구 등이 몽땅 들어있는 큰 캐리어였다.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체크인 카운터에 연결되어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고장 났다며, 복도 중간에 있는 임시 공간에 가방을 두고 가라더니..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어야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차에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여전히 항공사에서는 확인 중이라는 말뿐, 가방의 행방조차 파악이 안 된 느낌이다. (첫날은 가방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했고, 둘째 날에는 짐을 찾아 보냈다는데, 이쪽에서는 받은 게 없단다. 아 환장하것네)




수중에 남아 있는 건 아이들 간식이 가득 든 기내용 캐리어와 여권, 지갑, 핸드폰과 충전기가 든 배낭 하나.

 

당장 갈아입을 속옷과 양치는 항공사에서 내어 준 서바이벌 백 물품으로 해결했다. 입고 있던 옷은 다행히 색깔이 어두워 삼일 내내 입어도 더러워진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양말은 매일 밤 손빨래. 아침이면 대략 말라있었다. 바디로션으로 얼굴 보습과 클렌징까지 해결했고, 기본적인 메이크업 도구는 핸드캐리를 한 덕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수 있었다. 아, 어떻게든 살려면 사는구나.


다른 도시로 떠나야만 하는 셋째 날, 내 가방은 아직도 허공 어딘가에 떠도는 중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옷가게에서 아이들과 내 옷을 새로 한벌씩 장만했다. 왠지 돈이 아까워 할인 딱지가 붙은 품목으로만 골랐다. 투어 중간에는 강한 해 때문에 기념품샵에서 급하게 선글라스와 모자를 샀는데, 선글라스는 하루 만에 사망. 모자는 잘 쓰고 다니다가 마지막 날 호텔에 두고 와버렸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나 보다.

엉엉 현지 물가 치고는 꽤 비싼 선글라스였는데



큰아이는 "엄마, 그 말 타다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전쟁터에 안 끌려나간 남자 얘기 있잖아. 무슨 곤니치와였나? (아니 새옹지마 호사다마 전화위복.. 뭐 그런 거란다. 책 좀 더 읽자 딸아) 그것처럼 비록 짐은 잃어버렸지만 맘에 드는 새 옷이 생겨서 좋아."라고 한다. 아유 긍정적인 우리 큰 딸. 


과연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 전화위복이 될까?




부모님과의 여행은 올 초부터 일찌감치 계획했었다.  


마침 올해가 부모님의 결혼 40주년이기도 했고, 어느덧 반환점을 지난 타지 생활에 추억을 하나 더 남기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 안 가본 곳, 가보고 싶은 곳 등으로 후보지를 좁히다가 터키엘 가기로 결정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나라, 터키. 독일 사는 우리 가족들과 한국에 사는 부모님이 만나기엔 제격인 곳이었다. (독일에선 세 시간, 서울에서는 11시간 거리라 사실 중간 지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공항에서 부모님을 만나 첫 이틀은 수도 이스탄불에서 설렁설렁 돌아다녔고, 셋째 날부터 여덟째 날까지는 5박 6일의 여행사 단체 투어에 참석했다. 


이스탄불을 떠나 파묵칼레-콘야-카파도키아-앙카라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동선이었다. 총 이동 거리는 2,700 km, 버스 탑승시간만 총 35시간에 육박하는 '빡센' 일정이었지만 끝까지 무사히 잘 소화해냈다. 


왼쪽부터) 소금호수 - 파묵칼레 - 카파도키아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따라준 덕도 있었지만, 우리 그룹을 이끌어 준 가이드 선생님의 공이 가장 컸다(동생뻘이었지만, 훌륭하면 모두 선생님이다). 너른 지식과 말빨로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전혀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스물일곱 명의 관광객들을 일정 내내 유연하게 이끌었던 능력자. 함께 한 모든 분들 또한 가이드의 안내에 성실하게 따르는 모범생들이었다. 소위 진상 고객이 한 명도 없었다(... 혹시.. 우리였을까..?)


볼거리, 먹거리, 사람들 등 모든 게 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여행의 백미는 관광지가 아니라, 투어 마지막 밤 호텔 식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센스만점 가이드 선생님이 부모님의 결혼 40주년을 기억하고 있다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주신 것!


감동받은 울보 아빠는 또 눈물을 줄줄, 엄마는 함박웃음. 이역만리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분께 대리 효도를 받다니... 카파도키아산 와인 두병으로 함께한 분들과 감사한 마음을 나눴다.


짝짝짝~ 축하드립니다! 아빠는 냅킨 들고 울 준비 완료.


일주일 동안 행방을 잠시 감추었던 가방은, 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이스탄불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너덜너덜.. 그래도 다시 만나 반갑다!


인간지사 새옹지마. 

잠시 동안 분실된 가방 때문에 마음앓이는 했었지만 그 덕분에 또 새로운 인연과 추억을 쌓게 됐다.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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