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미니멀 라이프가 시작됐다
여행 첫날, 황망하게도 짐을 잃어버렸다.
정확히는 짐을 잃어버림을 당했다. 우리 세 식구 - 나와 두 아이 - 가 8박 9일 동안 입고 신고 쓸 옷가지와 신발, 세면도구 등이 몽땅 들어있는 큰 캐리어였다.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체크인 카운터에 연결되어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고장 났다며, 복도 중간에 있는 임시 공간에 가방을 두고 가라더니..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어야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차에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여전히 항공사에서는 확인 중이라는 말뿐, 가방의 행방조차 파악이 안 된 느낌이다. (첫날은 가방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했고, 둘째 날에는 짐을 찾아 보냈다는데, 이쪽에서는 받은 게 없단다. 아 환장하것네)
수중에 남아 있는 건 아이들 간식이 가득 든 기내용 캐리어와 여권, 지갑, 핸드폰과 충전기가 든 배낭 하나.
당장 갈아입을 속옷과 양치는 항공사에서 내어 준 서바이벌 백 물품으로 해결했다. 입고 있던 옷은 다행히 색깔이 어두워 삼일 내내 입어도 더러워진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양말은 매일 밤 손빨래. 아침이면 대략 말라있었다. 바디로션으로 얼굴 보습과 클렌징까지 해결했고, 기본적인 메이크업 도구는 핸드캐리를 한 덕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수 있었다. 아, 어떻게든 살려면 사는구나.
다른 도시로 떠나야만 하는 셋째 날, 내 가방은 아직도 허공 어딘가에 떠도는 중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옷가게에서 아이들과 내 옷을 새로 한벌씩 장만했다. 왠지 돈이 아까워 할인 딱지가 붙은 품목으로만 골랐다. 투어 중간에는 강한 해 때문에 기념품샵에서 급하게 선글라스와 모자를 샀는데, 선글라스는 하루 만에 사망. 모자는 잘 쓰고 다니다가 마지막 날 호텔에 두고 와버렸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나 보다.
큰아이는 "엄마, 그 말 타다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전쟁터에 안 끌려나간 남자 얘기 있잖아. 무슨 곤니치와였나? (아니 새옹지마 호사다마 전화위복.. 뭐 그런 거란다. 책 좀 더 읽자 딸아) 그것처럼 비록 짐은 잃어버렸지만 맘에 드는 새 옷이 생겨서 좋아."라고 한다. 아유 긍정적인 우리 큰 딸.
과연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 전화위복이 될까?
부모님과의 여행은 올 초부터 일찌감치 계획했었다.
마침 올해가 부모님의 결혼 40주년이기도 했고, 어느덧 반환점을 지난 타지 생활에 추억을 하나 더 남기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 안 가본 곳, 가보고 싶은 곳 등으로 후보지를 좁히다가 터키엘 가기로 결정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나라, 터키. 독일 사는 우리 가족들과 한국에 사는 부모님이 만나기엔 제격인 곳이었다. (독일에선 세 시간, 서울에서는 11시간 거리라 사실 중간 지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공항에서 부모님을 만나 첫 이틀은 수도 이스탄불에서 설렁설렁 돌아다녔고, 셋째 날부터 여덟째 날까지는 5박 6일의 여행사 단체 투어에 참석했다.
이스탄불을 떠나 파묵칼레-콘야-카파도키아-앙카라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동선이었다. 총 이동 거리는 2,700 km, 버스 탑승시간만 총 35시간에 육박하는 '빡센' 일정이었지만 끝까지 무사히 잘 소화해냈다.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따라준 덕도 있었지만, 우리 그룹을 이끌어 준 가이드 선생님의 공이 가장 컸다(동생뻘이었지만, 훌륭하면 모두 선생님이다). 너른 지식과 말빨로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전혀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스물일곱 명의 관광객들을 일정 내내 유연하게 이끌었던 능력자. 함께 한 모든 분들 또한 가이드의 안내에 성실하게 따르는 모범생들이었다. 소위 진상 고객이 한 명도 없었다(... 혹시.. 우리였을까..?)
볼거리, 먹거리, 사람들 등 모든 게 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여행의 백미는 관광지가 아니라, 투어 마지막 밤 호텔 식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센스만점 가이드 선생님이 부모님의 결혼 40주년을 기억하고 있다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주신 것!
감동받은 울보 아빠는 또 눈물을 줄줄, 엄마는 함박웃음. 이역만리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분께 대리 효도를 받다니... 카파도키아산 와인 두병으로 함께한 분들과 감사한 마음을 나눴다.
일주일 동안 행방을 잠시 감추었던 가방은, 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이스탄불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
잠시 동안 분실된 가방 때문에 마음앓이는 했었지만 그 덕분에 또 새로운 인연과 추억을 쌓게 됐다.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가르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