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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둥새 May 19. 2020

독일에 살지만 독일어는 못합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독일에 온 지 어언 3년. 

하지만 여전히 독일어는 제자리걸음이다.


한 때는 '독일 대학은 학비가 없다고 하니 재빨리 독일어를 마스터해서 공짜 교육이라도 받아볼까?' 내지는 '맥주나 소시지 가공 전문가(Meister) 자격증을 따서 한국서 가게를 차려도 좋겠어!'라는 야무진 꿈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독일어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다. 


둘째를 현지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안되겠다 싶어 5개월 동안 기초 레벨(A1)* 강의를 수강했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에 짧은 기간에 조금의 지식, 조금의 자신감을 획득했으나 딱 거기까지. 갖은 핑계로 독일어에 손을 놓게 되면서 내 독일어 실력은 아직도 간판이나 메뉴판을 겨우 읽는 정도에만 머무르고 있다.


* 독일어는 유럽언어공통기준(CEFR)에 맞춰 A1~C2까지 기본 6단계(세부 단계까지 적용하면 10단계 이상)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가장 기초인 A1 만 마스터하더라도 간단한 의사표시 정도는 가능. 알아듣진 못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더듬더듬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다. 토익으로 치면 약 200점 정도


CEFR 레벨 표시 @ 독독독 홈페이지



독일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변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영어, 근자감의 원인


독일어 습득에 있어서 최대의 복병은 의외로 영어였다.


영어 때문에 쓸데없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초기 학습이 늦어졌고, 영어 때문에 독일어 습득 필요성이 현저히 낮아졌으며, 영어 때문에 독일어 학습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영어와 독일어는 둘 다 고대 게르만어에서 파생된 나온 언어로, 뿌리가 같은 만큼 문법 체계와 쓰이는 단어들에 유사점들이 많다.


Museum [무제움], Zoo [초], Hobby [호비], Bus [부스] 등 발음은 영어와 살짝 다르나 동일한 철자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에서부터, Haus(House), Apfel(Apple), Buch(Book), Kaffee(coffee), Trinken(drink), Freund(friend) 등 비록 철자는 다르지만 조금만 유추해보면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들까지..





게다가 영어 단어는 총 50만 개 정도인데, 독일어 단어는 33만 개에 불과하다고 하니.. 학창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좋든 싫든 20년 이상 영어를 마주하고 익혔던 입장에서 얼마나 독일어를 우습게 봤었던가!



다들 영어 단어 이만 이천개 정도는 알잖아요?


"Der Konsum von Alkohol ist verboten"


입독 첫날, 독일어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집 앞 공원 표지판에서 이 문장을 사전 없이 해석 해 버린 게 화근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스스로 언어 천재임이 틀림없다고, 영어만 알면 독일어는 껌이라고 생각하는 일생일대의 자뻑이자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아는 게 병이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게 딱 그 짝이다.


우리말과 일본어가 비슷하다고 모든 한국인이 일본어를 잘하는 게 아니듯이, 영어를 좀 한다고 독일어를  저절로 잘하는 게 아니었음을 그땐 왜 깨닫지 못한걸까? 지금은 3년 전 나의 멱살을 잡아 끌고 독일어 학원에 강제로 앉혀놓고 싶은 마음 뿐이다.



독일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어를 잘한다!*


대부분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가는 영어 수업 메이트 할머니들도 정말 정말 영어를 잘한다.


하루는 내가 진심을 담아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하시는 거냐, 무슨 비법이 있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독일어와 영어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겸손한 답변을 하신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면 이 정도는 보통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익히 알려졌다시피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실업계 또는 인문계 학교 진학을 결정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과 대학교(Universität)를 나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 영어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영어에 대한 중요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요즘 세대들에게는 영어가 직업을 갖는데도 굉장히 중요해져서 어학연수나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 물론 영어를 못하는 독일인들도 많다. 특히 젊은이들 중에서는 영어로 말을 걸면 자긴 영어를 잘 못한다며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독일어 못해서 미안해.. 하면서 서로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근자감 뒤에 따라온 자격지심


뒤늦게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 후 한창 재미가 붙었을 때는 용기를 내 더듬더듬 한마디를 먼저 건네기도 했다. (주로 '이 물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조금 더 큰 사이즈 있나요, 화장실 좀 이용해도 될까요, 나 저거 가지고 싶어요... 등 쇼핑 독어) 그러나 몇 마디 대화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영어 대답을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답답했나? 날 무시하는 건가? '


외국인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었겠지만 기껏 용기를 내 본 입장에선 내가 이러려고 독일어를 배웠나 자괴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니 용기백배하여 실력이 늘기는커녕 괜한 자격지심만 생겨 어설픈 독일어 대신 그나마 나은 영어로만 말을 꺼내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재 내 독일어 실력..


언어 습득의 정공법이자 유일한 방법... 몰입 시간과 관심


천재적인 언어 감각을 타고나지 않는 한 언어 실력은 학습 시간에 비례한다. 중급 이상의 독일어 실력을 갖추는데 필요한 시간은 1년 이상이다. 독일로 공부하러 오는 유학생들도 꼬박 1년을 독일어 공부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어 공부를 하기도 전에 마이스터 자격증을 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마치 로또 사러가는 길에 재벌이 되는 상상을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달랐던 말인가!) 


공부나 취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독일 영주권은 신청에 앞서 B1 수준 이상의 독일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민자들이나 난민들이 빡센 독일어 수업(Intensivkurs)을 많이 듣는 이유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나는 언어 감각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다. 독일 문화에 대한 흥미도 높지 않을뿐더러, 둘째가 국제학교로 전학을 가고나서부터는 배움에 대한 의욕도 니즈도 없어져 버렸다. 더욱이 최근에는 역병의 창궐로 귀국 때까지 꼼짝없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므로 어차피 독일어를 배워봤자 쓸데도 없다. 


--


아따 핑계 한번 길었다. 솔직히 게을러서 그렇다. 


모르는 단어 한번 찾아보려다 괜히 유튜브만 보고, 온라인 강의 듣는답시고 웹서핑만 했고,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학원 수업을 빼먹었다.

이렇게 우물쭈물 지내다가 많은 날들을 지나보냈고, 이제는 공부보다는 슬슬 이삿짐 정리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비록 나의 독일어 공부는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에 오시는 분들, 또는 오셔서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미리미리 독일어를 익혀두시길 진심으로 권한다. 삶의 질이 한 5배는 높아질 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존감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어란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한 개인의 인생과 사고방식을 함축하고 있다. 때문에 대면하는 사회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만 평생 해온 사람들이 모두 좋은 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듯이, 단순히 '언어를 잘 아는 것'과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하지?? -@한국일보 기사 이미지 갈무리


언론인 출신 모 정치인의 어록이다.

품위를 지키면서 할 말은 다 하고 때로는 사이다까지 안겨주는 꼭 본받고 싶은 어법의 소유자다.

특히 오늘같은 날이면 '광주는 광주다웠습니다'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이 어쩜 더 깊이 와닿을 수 있을까 싶다.


그분의 前 연설비서관은 '말과 글은 그 자체로 그릇이다. 그 사람의 생각, 철학, 정서, 살아온 역사가 오롯이 담기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언어란 개성이 있는 언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바쳐 일구어낸 가치와 소신 그리고 실천의 언어라는 뜻이다'라면서 품위 있는 언어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님을 강조한다.




예쁘게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정작 나는 험하게 말하는 편이다. (부끄럽지만 육두문자도 곧잘 쓰곤 한다.)


한 때는 그게 표현의 자유이고, 촌철살인이며, 재치의 증거라고 착각했었다.(그러고 보니 꽤나 자뻑하는 스타일이었군..) 한마디 막말이 당장엔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을 순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내 품격을 깎아먹는 암적인 존재라는 것을,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뜨끔했던 '말' 관련 격언들



이제부터라도 간장종지만한 나의 언어 그릇을 조금 더 키워야겠다고 새삼 결심해 본다. 고급진 음식 재료가 푸짐하게 담길 수 있게 말이다. 


그 때가 되면 약간이나마 익혀두었던 독일어는 반짝반짝 더 쓰임새가 많아질 수도 있겠지! 




<참고 글>

“실종된 정치언어 품격 되살렸다” 이낙연의 말과 글 / 한국일보

언어 관련 명언 / Google 서치

독일어 어학원 '독독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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