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퍼스널 쇼퍼 제작진이라는 홍보문구에 현혹되어 영화를 봤다면 전혀 기대와 다른 영화. 심리적인 깊이나 복잡함을 기대하고 봐서는 안된다. 꽤나 가볍고 유쾌하게 끊임없이 지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프랑스식 저녁식사와 같은 영화. 약간은 히스테릭하게 말을 쏟아내는 줄리엣 비노쉬와 쿨내 진동하는 크리스타 테레를 보고 나면 섹시하고 지적인 프랑스 여인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핵심 토론 주제는 두 가지이다.
1. 종이책(알랭) vs e-북(로르)
전통 있는 출판사를 유능하게 이끌어온 편집장 알랭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디지털 마케터 로르를 채용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종이책이야말로 책의 가장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모습이라고 믿는다.
반면, 로르는 독서의 민주화 시대를 이끄는 e-북이 출판시장을 온통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 빠른 시대의 흐름 속에서 책을 지키기 위해 '바뀌지 않으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직은 정성이 담긴 질 좋은 커버의 책이 독자를 더 사로잡고, 종이책의 수요도 여전히 꾸준하다. 그러나 독서의 민주화도 매력적이다. 독서의 자유와 평등에 앞장서는 건 확연하게 e-북이다. 적은 돈과 중간자를 거치지 않은 블로그 등의 매체를 통해 접근성이 확연히 좋아졌다.
그럼 감독은 어떤 입장인 걸까?
우선 알랭과 로르는 끊임없이 종이책 vs e-북을 주제로 토론하지만 둘은 연인이다. 그리고 로르의 아버지가 소설가라는 설정은 책에 대한 애정은 로르도 알랭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로르의 전 여자 친구의 '너는 여자를 좋아하잖아?'라는 물음에 '그래 난 여자를 좋아해. 그러나 여자만 좋아하는 건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사실 스토리상 뜬금없는 장면이 꽤나 길게 나왔다.
추측하자면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종이책(또는 e-북)을 좋아하지만 그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종이책이든 e북이든 중요한 것은 책 자체다. 종이책이든 e-북이든 선택은 연애처럼 개인의 취향!
2. 픽션(레오나르) vs 논픽션(그 외 다수;)
레오나르는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의 캐릭터, 경험을 소재로 자전적인 책을 쓰는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실감 나지만 지인이라면 주인공이 누구를 모델로 쓰였는지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사람들은 이 정도면 논픽션이라며 그를 비판하지만 레오나르는 픽션(소설)이란 기본적으로 자전적이라는 입장이다. 친구이면서 담당 편집장인 알랭도 자아도취적인 그의 소설을 비판한다.
재밌는 건 셀레나는 레오나르의 연인이자 독자 중의 한 명으로서 그의 소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하지만 절대 자신의 얘기를 소설에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하니 책 자체는 인정하나 자신이 소재인 것은 싫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 이중적인 태도가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남의 얘기라면 흥미진진하지만 내가 소재가 되어 가십거리가 된다면 질색이다.
레오나르는 픽션을 쓴 걸까 아니면 논픽션을 쓴 걸까?
독자들에게 소설의 주제나 생각할 거리가 더 중요하게 다가오느냐 저자의 자극적인 경험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문학인지 자기 과시적인 경험담인지 구별할 수 있을 듯하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관객석에서 나올 만큼 영화에서 레오나르를 희화화하여 보여주지만 레오나르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으니 논픽션이냐 픽션이냐는 알 수 없지.
논픽션의 연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전작 '퍼스널 쇼퍼'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면 전환에 암전 기법을 사용했다. '퍼스널 쇼퍼'에서는 암전으로 인해 주인공의 혼란과 참전을 보여주는 듯했었지만 이 영화는 암전으로 인해 관객들이 말 그대로 영화라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사실 몰입감을 다소 줄이는 역할을 했다. 좋게 보면 수동적으로 감상하듯이 보는 것이 아니라 토론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생각하면서 볼 수 있게 해 준다.
논픽션의 유머감각
1. 부부 블랙코미디
레오나르, 발레리 부부는 서로 절대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거나 동의해주지 않는다. 공격 또는 무시하는 식의 대화를 나누어서 무슨 저런 부부가 있나 생각이 들지만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의견이 어떻든 간에 사랑하는 희한한 부부의 모습이다. 이 부부의 공격적인 대화가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반면 셀레나와 알랭 부부는 대화가 통하고 예술, 문학에 대해서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잘 나가는 편집장 알랭과 역시 잘 나가는 배우로 나오는 셀레나가 각자 다른 애인이 있고 그걸 짐작하며 질투하는 모습이 우습다.
항상 말에 가시가 있는 레오나르와 발레리 부부ㅋ
2. 개그 캐릭터 줄리엣 비노쉬
레오나르는 처량하면서도 꿋꿋하게 전 여자 친구를 소설에 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그 캐릭터다. 재밌는 건 프랑스의 대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맡은 셀레나도 레오나르와 콤비를 이르는 개그 캐릭터라는 점. 자신에 대한 타인의 말에 언제나 부정한다. 경찰이 아니라 위기관리사, 위기관리사가 아니라 그냥 경찰. 부정을 위한 부정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간파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신이 하는 일과 고민은 남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일이라는 히스테리가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간파당하고 싶은 사람은 레오나르인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고백을 술술 한다. 셀레나가 그런 정반대의 사람이랑 불륜을 6년간이나 했고, 그 업보가 결국 연인이었던 레오나르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감독의 유머 코드인 듯싶다.
배우들이 프랑스의 유명 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섭외하자는 등의 말을 하고 같은 직업? 인 셀레나가 연락처를 찾는 장면은 대놓고 웃기다.
대배우의 개그욕심
영화 논픽션 평점 : 영화에 토론의 장을 유쾌하게 가져왔다. feat. 눈호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