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칼레도니아 카니 키에서 프랑스행 배에 몰래 타고 파리까지 온 영리하고 귀여운 소녀. 배에서 만난 백작부인과의 인연으로 파리에서도 백작부인의 집에서 지내며 인간 동물원에서 알바를 한다. 영화 도입부의 인간 동물원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다.
딜릴리는 파리의 마당발 배달부 소년 오렐과 함께 미스터리 범죄조직 마스터 맨을 파헤친다. 10살 정도의 어린아이지만 매우 당돌하고 용감하다. 정확한 프랑스어 발음과 우아한 매너가 매력 포인트. 무엇보다 멍청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허를 찌른다.
오렐의 배달 자전거를 타고 파리를 누비는 딜릴리를 따라 파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딜릴리의 언중유골 1.
배달부 소년 오렐이 딜릴리에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우리말(프랑스어)을 할 줄 아냐고 묻자, 딜릴리는 "너보다는 잘할걸."이라고 유창하게 대답한다.
딜릴리의 언중유골 2.
부모님 중에 한 분이 프랑스인인 딜릴리는 뉴칼레도니아에서는 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희다고 놀림을 당했다. 파리에 와서는 사람들이 피부가 너무 검다고 놀린다. "좋은 점은 누가 멍청이인지 알려준다는 거야."
딜릴리의 언중유골 3
굉장히 웃겼던 장면으로 엠마 칼페의 운전기사가 딜릴리에게 원숭이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냐고 시비를 걸었는데 "아저씨를 이해해요. 저도 아저씨를 봤을 때 돼지랑 참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딜릴리의 언중유골 4
마스터 맨 2명을 줄넘기로 잡자 언론에서는 카니 키 소녀가 마스터 맨을 잡았다고 대서 특보가 났다.
"카니 키에서는 나를 프랑스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나를 카니 키 사람이라고 하네."
딜릴리가 앙리 루소의 작품 '꿈' 에 들어온 것 처럼 보인다. 신비로우면서 아름다운 색채가 환상적이다.
딜릴리는 자신을 프랑스인, 카니 키인, 여자아이 등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하려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마스터 맨의 단서를 찾기 위해 파리의 유명인들은 만나며 장래희망이 점점 많아지는 딜릴리. 딜릴리(Dilili)라는 국정 불명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딜릴리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딜릴리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딜릴리의 정체성이다.
미스터리 범죄조직, 마스터 맨
여자는 남자보다 하등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조직. 여자를 네발이라고 부르며 검은색 암막으로 온몸을 덮고 네발로 걷는 훈련을 시켜 의자로 사용한다. 성인 여자들보다 훈련하기 쉬운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어릴 때부터 훈련시켜서 네발이로 키우려고 한다.
영화에서 네발이로 불리는 여자들을 덮은 검은 천과 부르카는 얼마나 다른가?
마스터 맨은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악당이지만 더 끔찍한 것은 19세기 파리가 아닌 21세기 현재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레반 등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 단체는 마스터 맨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복종해야 하고 혼자 다니면 안 되고 외출을 하려면 온몸을 부르카로 가려야 하고 당연히 참정권이 없고 운전도 하면 안 되는 곳이 아직도 있다. 종교 또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짓밟고 굴욕과 수치감을 주는 일이 영화로 보면 더욱더 말도 안 되는 인권침해임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배경, 벨 에포크 시대(1980~1914)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과학 문명 발달에 따른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가득했고, 예술분야에서는 인상주의와 입체파가 등장하며 대상과 최대한 똑같이 표현해야 하는 사실주의 중심의 예술로부터 탈피하며 다양성에 대한 도약을 했다. 인류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평화로운 시기.
영화에서 파스퇴르, 퀴리부인, 에펠, 로댕, 모네, 르누아르, 마티스, 브랑쿠시, 피카소, 드뷔시, 엠마 칼페 등등 실제 벨 에포크 시대의 유명인사들을 마스터 맨의 단서를 쫓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인물들로 등장시켜서 벨 에포크 시대의 매력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같은 풍경에서 다른 그림을 그리는 모네와 르누아르의 모습이 재미있다.
딜릴리가 만난 유명인사 중에는 로댕의 방해공작으로 예술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던 까미유 끌로델, 여자라는 이유로 남편의 이름으로 소설을 내야 했던 콜레트도 있었다. 파리 만국 관람회에서는 그 유명한 에펠이 에펠탑을 세우고, 문명의 발전을 과시하지만 만국박람회 전시에는 딜릴리가 알바를 하는 인간 동물원이 있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인종에 대한 편견, 인권침해가 만연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어두운 면이 과학과 예술의 발전으로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상과 대비되어 부각된다.
색채의 마법사, 미셸 오슬로 감독
프랑스 인으로, 어린 시절을 프랑스 식민지였던 기니에서 보냈다. 기니에서 지낸 영향이 작품에 많이 드러난다. 미셸 오슬로 감독의 영화는 아프리카가 떠오르는 원색 계열의 다채로운 색감이 아름답고, 인종, 여성차별 등 인권문제를 주요하게 다룬다.
종이를 잘라서 팔,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컷아웃 기법의 천재다. 컷아웃 기법의 대표적인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1999년작)는 그림자 애니메이션임에도 오색찬란한 하늘색이 아름답고, 관습과 편견을 뒤집는 재치 있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1999)
파리의 딜릴리도 얼핏 보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영화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온 소녀가 주인공이고, 인간 동물원에서 알바를 하며 여성을 납치해서 학대하는 범죄조직을 쫓는다. 인권침해에 관한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아름다운 파리, 만나보고 싶은 벨 에포크 시대의 명사들의 깜짝 출현이 과격하고 충격적인 스토리를 중화해준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음악 속에 심각한 주제를 녹여내는 재치가 미셸 오슬로 감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유명 소프라노 가수 엠마 칼페의 목소리는 나탈리 드세이가 연기했다. 눈호강과 귀호강을 함께!!
추!! 천!!
예술을 사랑하고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환상적인 영화다. 수많은 명화들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 소프라노 엠마 칼페를 연기한 나탈리 드세이의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영화. 더불어 당돌하게 편견에 맞서는 사랑스러운 딜릴리를 보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파리의 딜릴리는 종교의 자유와 인권 문제를 연결 지어 생각할 거리가 많다. 종교 및 인종 갈등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룬 미셸 오셀로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아주르와 아스마르(2006)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