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불타는, 갈망하는, 화급한 사안, 문제
감독: 이창동
주연: 유아인(종수), 스티븐 연(벤), 전종서(해미)
버닝의 스토리라인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와 숨겨진 의미들이 많다.
표면적인 줄거리 - 문예창작과 졸업 후, 알바를 하며 지내던 종수는 마찬가지로 알바를 하던 고향 친구 해미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벤과 썸을 타며 종수를 괴롭게 만든다. 벤은 소시오패스 같은 섬뜩한 면이 있는 부자 한량으로 셋은 종수네 시골 고향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해미는 잠들고,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두 달에 한 번씩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고백한다. 그날 이후 혜미는 자취를 감추고,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사실 해미를 말한 것이라고 여기고 벤을 미행하며 증거를 찾는다. 마침내 벤의 집에서 해미의 손목시계와 키우던 고양이 보일이를 발견 후, 확신이 든 종수는 어느 겨울날 벤을 불러 죽이고 불태운다.
해미는 어떻게 해석해도 크게 결말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성형을 했고, 카드빚 때문에 가족들과도 등을 지고 마땅한 친구도 없이 외롭게 도시에서 알바를 하며 지낸다. 겉으로는 밝게 말하지만 팬터마임으로 바라는 대상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연습을 할 만큼 곤경에 처해있다. 빚쟁이에게 쫓기고 하루하루 연명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로움과 허무함에 휩싸인 그녀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보러 아프리카 케냐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자신과 그레이트 헝거를 동일시한다.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그녀는 종수에게 마음을 의지하려고도 하고 벤에게 물질적으로 의지하고자 하기도 하지만 결국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녀의 자취방의 모습이나 그동안 그녀의 언행으로 보아서는 자신의 의지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나 과연 그것이 그녀의 진정한 의지일까? 여기서 벤은 그녀가 사라지는데 기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사실 그녀는 지배 집단의 아비투스로 인한 상징적 폭력의 희생양이다. 카드빚을 지면서까지 성형을 하면 한층 높은 행복, 계급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남은 건 빚더미뿐이고, 벤과 벤 친구들처럼 재미로 춤추며 지내고 싶지만 현실은 생계를 위해 내 신체를 흔드는 것일 뿐이다. 빚쟁이에 쫓겨 지내며 외톨이가 된 그녀의 삶에는 삶에 대한 의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삶을 붙들어 주는 어떤 가치도 없을 때 삶의 의미를 고뇌하고 갈망하게 된다. 그녀도 그렇게 갈망했다. 그녀를 그녀 삶으로부터 내쫓은 것은 그녀 의지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이를 사회의 지배계층인 벤이 그녀를 처단하는 것으로 영화상 보여주는 것은 지배계층의 상징적 폭력을 벤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하여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영화에는 메타포가 많이 나온다. 이는 영화 전반부에 벤이 메타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숨어있는 메타포들에 대한 암시를 줌으로써 관객들이 메타포 찾기라는 숨바꼭질에 동참하게 만든다.
벤이라는 인물은 영화 결말에 대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젊은 여자들을 두 달에 한 번씩 죽이는 연쇄살인마로 보면 이 영화의 결말은 복수이고, 그를 선량한 시민으로 보면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를 물려받은 종수의 섣부른 판단이 저지른 범죄이다. 그가 해미를 죽인 것으로 암시하는 듯한 장면들은 많다. 메타포라는 말을 종수에게 언급한 후 비닐하우스 얘기를 꺼낸 것, 벤의 집에 있는 여자들의 액세서리와 해미가 사라진 후 그곳에 놓인 해미의 손목시계, 보일이로 추정되는 고양이.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는 사실 없다.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그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상한 취미가 있고, 애인과 헤어지면 전리품으로 액세서리를 간직하며 버려진 고양이를 돌보기도 하는 선량한 남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3의 해설도 제시해보려 한다. 그는 연쇄살인마도, 그저 독특한 취미생활을 즐기다 피해자가 된 억울한 사람도 아니다. 벤의 언행을 살펴보면 벤이 가장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재미'다.
카페에서 해미의 손금에서 돌이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다며 본인이 꺼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밖에서 전화통화를 할 때 집어온 돌을 올려놓고 꺼냈다고 장난을 친다.
"이거 하려고 밖에 나갔다 온 거야?"
"응. 재밌잖아. 난 재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
이 장면이 벤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대사다. 벤은 종수를 처음 만나 식사를 할 때, 소설을 쓴다는 종수에게 흥미를 감추지 않으며 말한다.
"제 얘기를 들려줄게요. 소설에 쓰세요."
그 이후의 벤의 모든 행동과 말들을 실은 종수에게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일부러 자신을 독특한 캐릭터로 만들고 종수에게 소설에 쓰일 소재를 제공했다.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둥의 말을 흘려 수상적이게 보이도록 하고 집에는 여자들의 액세서리를 놓아 종수를 섬뜩하게 만든다. 이때 메타포라는 말을 흘려 종수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벤은 해미와 함께 굳이 종수의 시골집에까지 찾아와 자신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며 해미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고, 결국 '나는 씨발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고.' 울부짖는 종수를 보고 웃으며 재미있어한다. 종수씨는 사람이 너무 진지하다고 말하며 좀 가벼워져 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종수에게 주는 힌트라고 볼 수 있다.
부유한 상류층인 벤은 직업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재미만 추구하며 사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는 그저 다 재미로 한 일이었다. 해미가 사라진 것은 사실 벤과는 상관없이 이미 벤을 만나기 전 그녀의 상태로 보아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종수는 벤처럼 가볍게 재미만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벤을 살인자로 확신하고 죽이게 된다.
이렇게 결말을 본다면 삶이 벤에게는 너무 가벼웠고, 종수에게는 무거웠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죽음에 이르는 벤은 죽임을 당할 때 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이는 벤이라는 인물이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이게 한다. 항상 신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재미로만 인생의 의미를 찾는 허무한 삶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무한한 희열의 세계로 가는 그리스 비극적인 결말이다.
마지막으로 종수를 어떻게 보느냐는 영화의 결말을 180도로 바꾸어 놓는다.
종수는 소심하고 자신이 없으며 항상 입은 헤 벌어져서 사태 파악이 한 발짝 늦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자기 이야기 같아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은 미국의 남북전쟁 후, 사회의 부조리함, 고통, 허무함에 대해 얘기한다. 종수의 시골 고향집 농장은 망해서 송아지 한 마리밖에 없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로 재판을 받는데 자존심만 세서 결국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어머니는 도망갔다가 16년 만에 돈이 필요해서 아들에게 연락을 한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지만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백수로 시골집에서 처박혀 송아지를 돌보다가 그마저도 어머니의 빚을 갚기 위해 판다.
무기력하고 무기력한 캐릭터인 종수가 그런 선택(살인)을 과연 할 수나 있을까? 물론 오히려 그런 인물이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 매우 흥미로운 이동진 평론가님의 가설을 인용하려고 한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지고 벤을 의심하며 증거를 찾다가 결국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오며 카메라가 줌 아웃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줄거리고 그 후, 벤을 불러내 죽이는 장면은 종수의 소설인 것이다. 종수는 세상이 다 의문투성이라 소설을 한 줄도 못쓰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의문을 풀었고 그리고 이제 소설을 쓴다. 영화는 계속 종수의 시선을 쫓았고, 종수가 없는 장면은 없었으나 마지막 벤을 죽이는 장면은 종수 없이 벤이 먼저 와서 기다렸고, 죽을 때도 종수가 아니라 벤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이는 종수가 쓴 소설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이 가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종수의 내면의 갈등(아버지, 어머니, 해미)이 해결되며 소설로 승화하는 성장영화로서의 결말로 볼 수 있겠다. '갈등-해결-승화' 어딘지 근현대 소설의 결말들과 닮았다.
버닝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청년실업문제와 사회계급의 차이에서 오는 좌절과 분노로 보여주고, 삶의 허망함 속에서 의미를 갈구하는 인물을 통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리고 마치 소설처럼 메타포를 숨겨놓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 이창동 감독은 실제로 소설도 집필한 작기이기도 한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헛간을 태우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를 버닝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버닝은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는 매력적인 문학작품과 같았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몇 번은 더 보고 계속 생각하고 싶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