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지 않은 아름다운 뱀파이어 영화
감독: 짐 자무쉬
개봉: 2014. 1. 9.
출연: 틸다 스윈튼(이브), 톰 히들스턴(아담), 미아 와시코브스카(애바), 안톤 옐친(이안), 존 허트(말로)
영화는 누워있는 이브의 모습이 음악과 함께 턴테이블처럼 천천히 돌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기타를 껴안고 잠들어있던 아담으로 장면전환이 되며 역시 천천히 돌아 클로즈업되고 둘은 일어난다. 이 첫 장면이 말 그대로 예술이다. 끝없이 살아가는 삶의 권태처럼 느릿한 음악에 죽은듯이 잠들어있던 뱀파이어가 숙명을 맞이하듯이 눈을 뜬다. 그리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예술적인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인 만큼 이 뱀파이어 영화는 미술, 음악,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에는 자고 밤에만 활동하는 뱀파이어 커플은 집에서 주로 음악을 하고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한다. 한마디로 딜레탕트들이다. 아담의 집 내부 공간이 배경으로 주로 나오는데 아주 빈티지한 색감에 앤틱하면서도 아늑하고 살짝 비좁은 느낌도 든다.
이브는 손으로 물건을 만지면 만들어진 시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녀는 항상 책과 함께한다. 사랑하는 아담에게로 가는 디트로이트행 여행에서 유일하게 챙기는 짐은 책들이다.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이브의 뱀파이어 친구 말로와 아는 사이로 말로가 대신 글을 써준 적도 있는 것으로 나오는 게 재밌다. 거기다 아담은 슈베르트에게 현악5중주를 슈베르 이름으로 내라고 호의를 베풀기도 했단다. 이런 유머러스한 내용이 첨가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조금은 가볍게 해주었다.
집돌이 아담의 인간 혐오와 우울증, 자살충동 극복과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내용이 줄거리라 오락성이 있는 뱀파이어 영화는 아니기에 중간중간 실소라도 흘릴 수 있는 장면으로 판타지 영화의 상상력이라는 귀여움을 느낄 수 있다.
o형 피가 제일 깨끗해서 모기가 좋아한다는 농담처럼 뱀파이어들은 o형 피로 만든 하드를 매우 좋아한다. 이 장면도 참 재밌었다.
물건이 가득해 좁아보이는 공간에 두 명?의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뱀파이어는 더욱 길어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대사도 그리 많지 않고 음악과 미장센, 배우들의 비쥬얼이 다 했다.
위태해보였던 아담은 눈부신 황금빛의 따뜻한 이브가 온 후로, 밤마실 데이트도 하고 체스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브의 말썽쟁이 탕아 동생 애바로 인해 아담의 유일한 동업자 이안이 피를 빨려 죽어 어쩔 수 없이 이브가 있던 모로코로 와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계속 된다. 이래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인가 보다.
두 배우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 영화상으로는 느낄 수 없다. 아담과 이브는 아인슈타인의 유령 원격 작용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영향을 주고 받는 천생연분이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 태초의 커플 아담과 이브처럼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연기가 참 좋았다. 톰 히들스턴은 처음에 아예 못 알아봤다. 토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좀 닮은 사람인줄 알았다; 이렇게 섹시한 사람인줄 처음 알았다!
모로코의 밤 거리 색감이 아름답다. 디트로이트와 모로코 두 도시 모두 황량하지만 모로코의 밤 거리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있어 은은하게 빛난다. 아랍음악과 일렉트로닉을 접목시킨 싱어송라이터 야스민 함단의 목소리와 몸짓은 모로코의 밤공기와 잘 어울렸다. 지친 뱀파이어 커플도 모로코의 순수한 젊음과 사랑으로 곧 기운을 차릴 예정이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며 끝나는 장면도 마음에 든다. 삶에 대한 이브와 아담의 가치관과 철학에 대한 고민으로 짐짓 심오하던 영화는 마지막에 뱀파이어 영화임을 잊지 않고 강렬하게 끝난다.
아이폰 유저, 외출 시에는 꼭 쓰는 썬글라스와 뜬금없이 우아한 장갑. 비행기는 퍼스트클래스. 이런 설정들이 뱀파이어하면 생각나는 고전적인 느낌과 버무려져 신선함을 더한다. 뻔하고 유치할 수 있는 설정들이 짐 자무쉬 감독의 감각적인 분위기에 녹아 생동감을 주는 영화. 미장센과 음악때문에 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