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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Mar 25. 2018

#01 배우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다

배우에 대한 무한 애정에서 시작된 연출가 강진엽의 고군분투기


영화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뭘까?


아마 <스페인 영화의 이해> 수업은 대학에서 들었던 최고의 수업이 아니었나 싶다. 훌리오 메뎀부터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영화까지. 완전히 새롭게 영화보는 법을 배웠다. 한예종 영상원 출신이었던 교수님처럼 영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말리실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왠만하면 하지 말라고 할텐데, 너라면 영화 공부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영화를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열심히 글을 쓰고 영화를 봤다. 그러나 졸업학기에 정작 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진로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겁이 났던 것 같다. 영화의 문턱이 참 높게만 느껴졌다.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스태프는 어디서 구해야 하며,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어려운 일투성이다.

 

27살의 나이에 문득 상경하여 영화를 하기로 했다는 어느 고시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로 올라온 지 6년째, 그는 벌써 다섯 번째 단편 영화를 만들고, 올해 옴니버스 장편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계속 영화를 하게 하는가.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그의 두 번째 단편 <취중진담>의 배경이 되었던 문래동에서 연출가 강진엽을 만났다.  


문래동 창작촌에서 만난 연출가 강진엽 ⓒ 헤아리는 사진기


# 원맨 밴드(One-man Band) 연출가


2014년 처음 만드신 <청원휴가>부터 <취중진담>, <백패킹>, <반동> 그리고 지금 작업 중이신 장편 <하이라이트>까지. 정말 영화를 열심히 만드시는 것 같아요. 


서울에 올라올 때 저와 한 약속이자 목표였어요. 매년 한 편씩은 꼭 만들자. 영화를 하려고 올라온 건데, 놀 수는 없잖아요. 열심히 해야죠.


데뷔작 <청원휴가>나 <백패킹>도 혼자 작업을 하셨고, 이번 영화도 스태프 없이 혼자서 작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주연배우) 성훈이랑 <청원휴가>를 찍을 때는 배우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기 위해 스태프를 쓰지 않았어요. (실제로 군인이었던) 성훈이가 4박 5일 휴가를 나왔을 때 촬영을 한 건데, 제가 휴가를 독점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만에 나온 휴가인데. (웃음) 짧은 촬영기간 동안 감정을 만들어내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성훈이와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스태프가 많아지면 집중력을 빼앗기게 될 것 같았거든요.


이번에 촬영한 <우리의 소원>은 장편 옴니버스로 기획 중인 <하이라이트>의 첫 번째 단편인데요. 배우들끼리 자연스럽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고, 그래서 저도 같이 노는 기분으로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었어요. 저한테는 그렇게 배우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간들이 영화 작업에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후반작업 진행 중인 <우리의 소원> 스틸컷 ⓒ 숲속필름


그래도 혼자서 촬영, 녹음, 제작, 편집까지 다 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죠. 기동성이나 비용절감 측면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요. 그런데 저처럼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 감독은 스태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학교에서 영화를 시작했다면 주변에 영화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스태프를 부탁하면 되지만, 저는 그런 인력 풀이 없었던 거죠. 필름 메이커스와 같은 채널이 있긴 하지만,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스태프를 구하더라도 여전히 어려운 점은 있어요. 영화를 만들다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연출자와 촬영 감독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런 부분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저는 주변에 영화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스태프를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늘 현장에서 조심스러운 거죠. 이 스태프가 나랑 영화 안하겠다고 하면 다음 스태프는 어디서 구하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태프보다는 배우들에게 더 많이 기대게 되기도 해요.


# 배우님 덕에 영화합니다


감독님에게 배우들이 왜 중요한가요? 


저는 아마추어잖아요. 제가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어떤 감정들인 건데, 촬영이나 연출도 중요하지만, 그 감정을 영화로 표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배우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촬영한 클립 중에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앵글이나 카메라 무빙이 별로여도 그 장면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취중진담>에서 박찬진 배우님의 연기는 진짜 압도적이었어요. 


찬진이 연기도 훌륭했지만, 저는 동시녹음(붐맨)을 해준 친구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12분짜리 롱테이크를 일곱 번이나 갔으니까, 얼마나 팔이 아팠을까. (웃음) 그때도 일곱 개 클립 중에서 찬진이의 연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 컷을 골라서 편집을 했어요.


취중진담(2015, 17min) 주연 박찬진, 하성훈 / 연출 강진엽 ⓒ 숲속필름


왜 감독님 영화에는 남자 배우들밖에 출연하지 않는 건가요? 


아, 이번엔 여자 배우님도 출연 하십니다! (웃음) 아무래도 제가 남성이다보니 여성인물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걸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만드는 장편은 스스로 여성의 입장에 최대한 이입해보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시나리오를 쓴 다음 출연하실 여자 배우님께 보여드리며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청원휴가>에서 하성훈 배우가 만들어내는 감정선도 인상적이었어요. 


성훈이랑은 독립영화협의회(이하 ‘독협’) 워크숍 할 때 처음 만났어요. 공동연출 작품을 할 때였는데, 성훈이가 오디션을 보러 왔죠. 주연은 다른 배우님으로 결정이 되었지만, 성훈이의 열정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극중에 ‘커피남’이라는 단역으로 성훈이를 캐스팅했어요. 제가 맡은 씬이 아니었는데 일부러 '커피남'이 등장하는 장면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고요.


성훈이가 역할에 몰입하는 모습이 정말 좋았고, 다시 같이 작업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참에 군대에 간 성훈이가 제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연이 이어지게 되었죠.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청원휴가>라는 영화를 함께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시나리오는 다른 내용이었는데, 성훈이가 실제로 자기 누나 결혼식 때문에 휴가를 나오게 되면서 청원휴가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쓴 거예요.   


청원휴가(2014, 14min) 주연 하성훈 / 연출 강진엽 ⓒ 숲속필름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하성훈 배우와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식으로 하셨어요? 


성훈이가 군대에 있을 때라 그게 쉽지 않았어요. 시나리오를 보낸 다음부터 성훈이가 매일 밤 전화를 했어요. 청소시간 끝나고. 저는 매일 밤 그 시간이 되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고요. (웃음) 주말에는 더 자주 통화하면서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군부대에 있으면 할 게 없으니(웃음) 성훈이도 시나리오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루는 성훈이가 부대에서 시나리오를 보다가 군 간부한테 들켰대요. 군 의문사에 대한 시나리오인데...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죠. 다행히 간부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시나리오를 다 읽은 다음에 그냥 돌려줬다고 하더라고요. 성훈이가 군인 신분이라 여러가지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 캐릭터를 만들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만든 영화로 전주국제영화제에 가시게 되어서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전공이 법학이라, 원래 법 관 소재로 <변론>이라는 시나리오를 써서 스태프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반응이 너무 안좋은 거예요.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 대신 <청원휴가>의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그 영화로 전주에 가게 된 거죠. 그래서 성취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제 영화 작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생겨서 결국 혼자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조금 위로를 받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전에도 여러 영화제에 출품을 했어요. 원래 20분 버전으로 출품을 했는데 번번히 떨어지더라고요. 떨어질 때마다 ‘어떤 게 문제지?’ 고민하면서 혼자 보내던 잠수의 기간이 3개월 정도 됐거든요. 그러다 밖에 나온 것 자체가 좋았죠. 영화제에 가서 사람들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무엇보다 말년 휴가 나온 성훈이와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시네필의 초상 첫 번째 인터뷰 ⓒ 헤아리는 사진기


# 영화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사람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보셨어요? 어떤 영화를 좋아하셨나요? 


제가 마산 출신이라, 어릴 때는 영화를 거의 못봤어요. 영화관도 몇 군데 없어서 시내까지 나가야 영화를 볼 수 있었죠. 시험기간 끝나면 친구들이랑 영화를 보러 갔어요. 그럴 때면 이상하게 늘 손예진 주연의 영화들이 걸려있었던 것 같아요. <클래식>이나 <연애소설> 같은 그런 영화들.


그러다가 스무 살에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를 갔어요. 영화가 좋아서 간 건 아니었고, ‘이제 나는 성인이니까 (웃음) 축제란 축제는 다 가볼거야!’ 라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다녔던 것 같아요.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도 모르고, 예매도 하지 않고 무작정 혼자 부산으로 갔어요. 남포동에 있는 부산극장이었는데. 남은 표를 보고 처음 예매했던 영화가 차이밍량의 <흔들리는 구름>이었어요.  


차이밍량, <흔들리는 구름> 스틸컷 (사진 출처 : 한겨레)


도대체 이건 무슨 영화인가, 싶었어요. 사람들은 전부 다 벗고 나오고 (웃음) 갑자기 뮤지컬을 하고 있고. 색감은 참 예쁘네. 뭔지 모르겠는데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제 삶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잖아요. <클래식>이랑 <연애소설> 같은 영화만 보던 아이였는데. <첫사랑 사수궐기대회>도 엄청 좋아하고. (웃음) 저한테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오후에 <만덜레이>와 <린다린다린다> 같은 영화들도 봤는데, 문득 여기 더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급하게 3박 4일로 숙소까지 잡고 계속 영화를 보기로 했어요.


혼자 갔으니까, 아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고. 4일 내내 영화만 봤어요. 그때 본 영화들이 다 이해가 된 건 아니었지만,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다른 축제는 가지 않고 영화제만 다니기 시작했죠. 부산, 전주, 제천, 부천 등등.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물론 아니죠. 저는 전공이 법학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전공을 살려서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법원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노량진 고시원에 살며서 공부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영화가 보고 싶잖아요. 원래 영화를 보던 사람이니까. 주말마다 혼자 용산 CGV에 가서 영화 보는 게 낙이었어요. 그러다 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나니까,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더라고요. ‘잘 생각해보자 진엽아. 지금 공무원이 하고 싶은 거니, 아니면 영화가 하고 싶은 거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 헤아리는 사진기


진짜 영화를 하고 싶은 걸까?


선뜻 답을 못찾겠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산에 가보기로 했어요. 가서 영화 몇 편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맘 잡고 공부해야지 하고. 2012년 부국제였는데,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한 영화를 만났어요. 남들이 생각할 때 좋은 영화가 아닐 수 있지만, <1999, 면회>라는 광화문 시네마의 첫 장편 영화였어요.  


부국제에서 영화를 보는데, 저에겐 영화가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친구들을 다 끊었거든요. 남들이 부러워질만한 순간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문자도 안받고, 연락처도 어머니 번호만 적어놓고. <1999, 면회>에 세 친구가 나오잖아요. 영화를 보는데, ‘나도 저런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 다 어디갔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죠. 김태곤 감독님이 GV에 오셨는데, 본인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이야기를 써서 스태프들에게 보여줬는데,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3천만원을 모아와서 영화를 찍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지금 내가 영화로 보고 있고. 신기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김태곤, <1999, 면회> 스틸컷 / (왼쪽부터) 안재홍, 심희섭, 김창환 배우 (사진 출처 : 씨네 21)

 

심희섭 배우가 맡은 ‘상원’역이 김태곤 감독님 자신의 모습인 건데, 저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결국 그해 부국제에 상영된 <1999, 면회> 모든 회차는 다 봤던 것 같아요. 보면 볼수록 심희섭 같은 배우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태곤 감독님 같은) 감독이 되어야겠다. 집에 가서 2022년까지의 십 년 계획을 쭉 적어서 부모님께 드렸어요.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으니깐요.


그래서 부모님께서 동의해주시던가요? 10년 계획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당연히 설득이 쉽지 않았죠. 부국제 다음에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가 있어서 서울에 올라갔어요. 당일치기로 올라갔는데, <1999, 면회> 상영이 있던 날이었어요. 심희섭 배우와 GV가 있었는데, 영화가 끝난 다음 배우님께 가서 서류봉투를 드렸어요. 거기에 저의 10년 계획과 기획 중인 영화 줄거리, 그리고 이메일 주소가 적힌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다짜고짜 서류봉투만 드리고 바로 무대에서 내려왔어요.


제 10년 계획이라는 게, 2020년에 심희섭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고, 2022년에 개봉하는 것이었어요. 무턱대고 배우님께 계획을 통보한 채, 집에 내려와 부모님과 싸우고 있었죠. 그런데 2~3일 정도 뒤에 심희섭 배우한테 이메일이 온 거예요! 편지 잘 봤고, 꼭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서울 올라오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아무것도 된 건 없는데 뭔가 길이 뚫리는 느낌이었어요. 무조건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시원 생활이 너무 싫어서 다시 마산으로 내려온 건데, 올라가면 다시 고시원에서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떡해요 가야지. 이메일이 온지 일주일만에 결정해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영화 하러 가야겠다는 확신이 든 순간 ⓒ 헤아리는 사진기


진짜 멋지네요. 그 이후로 심희섭 배우는 다시 만나셨나요? 


올라가서 서울에 왔다고 연락했더니 안국역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그 때 광화문 시네마 사무실이 안국역에 있었거든요. 사무실에 갔더니 (영화 <1999, 면회>의 주연배우였던) 김창환, 안재홍이랑 김태곤 감독님, 문상원 촬영감독님 등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심희섭 배우가 그분들한테 제 소개를 해주는 거예요. 이 친구는 영화가 하고 싶어서 서울로 왔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친구고, 앞으로의 계획은 이러저러하다는 얘기들을 했죠. 그게 진짜 감동이었어요. 제가 쓴 그 편지를 다 읽어준 거잖아요.


지방에서 영화하겠다고 우발적으로 올라온 사람이, 뜬금없이 찾아온 건데. 사실 ‘영화를 왜 하려고 하지? 하지말고 그냥 내려가!’ 라고 애기할 수도 있는 건데,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저를 멋있게 보고 응원해주는 거에요. 그 이후에 <1999, 면회>가 개봉했는데, 30번은 봤던 것 같아요. 영화가 3,000명 정도 들었으니 제가 1% 정도 기여한 셈이네요. (웃음) GV 자리도 많이 갔는데, 저는 술자리 가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됐어요. 그 후로 그분들과 인연이 계속 된 것도 아니지만, 그 경험이 너무 좋았고 힘이 됐어요. 바로 다음 해 독협에 들어가게 되었죠.


# 비전공자로서 영화를 한다는 것


독협은 워크숍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정규 과정은 두 달 동안 수업을 받고, 2차 실습 촬영을 두 달 정도 진행해요. 편집 기간 두 달포함 하면 실습은 네 달 정도죠.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나요? 


저희도 원래 다섯 명이었는데 저랑 제 친구 빼고 다 그만뒀죠. 그래서 저는 (이런 과정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겪어보고 빨리 결정할 수 있잖아요. 이런 시스템이면 난 안해, 하고.


지금은 20~30명은 되어야 수업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적자가 너무 심해서. 저희 기수 때 제일 적자가 심했을 거예요. (웃음) 사람들이 없어서 힘들긴 했는데, 그 때 많이 배워서 지금도 혼자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촬영도 좀 해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고, 녹음도 몇 번 해보니까 되는 거 같고. 독협 수업을 영상미디어센터에서 하니까 센터 수업도 많이 들었어요.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보자라는 마음으로요.


그러면 같이 영화할 동료들을 만나기가 쉽진 않으셨겠네요. 


독협 다음으로 영화고용복지위원회에서 하는 영화인 실무 교육센터 수업을 들었는데 그러면서 몇 분 알게 되기는 했죠. 그 외에는 영화제에서 감독님들 만나고, 감독님들 통해서 배우님들을 알게 되고. 그래도 여전히 스태프를 모셔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 작업을 많이 하신 실력있는 스태프 분들이 제 영화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그만큼 도움이 되어드려야 할텐데. 아직은 제가 그럴 여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배우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세요? 


지금 <우리의 소원> 작업을 함께하고 있는 최찬호, 임지호 배우는 <반동> 작업할 때 캐스팅한 배우들인데요. 제가 오디션을 안보거든요. 대신 미팅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프로필이랑 연기 영상 같은 자료들을 찾아본 다음 합이 잘 맞을 것 같은 배우들만 뽑아서 미팅을 했어요. 그랬더니 찬호랑 지호가 나중에 너무 잔인한 방식이라고 지적해주더라고요. 배우들에게 오디션이라는 게, 결과와 상관없이 자기 연기를 최대한 펼쳐보일 수 있는 자리인 건데, 그런 기회를 박탈하는 건 옳지 않다고요.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 같아요.


영화 리스트를 적어내려가는 중 ⓒ 헤아리는 사진기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은 없나요? 


지금 작업 중인 <하이라이트>는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까지 다섯 계절을 담은 옴니버스 영화로 작업 중인데요. 제작비 지원 프로그램이 열리는 일정을 고려하면 여름부터는 펀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겨울과 봄 촬영 및 후반작업 비용을 모으기 위해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제작자가 없으니까 이런 부분들이 어려운 거 같긴 해요.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하고 싶으신가요? 


영화제에 지금껏 영화를 세 편 틀었잖아요. GV를 가보면 질문이 그렇게 심오할 수가 없어요. (웃음) 분명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들이긴 하지만, 군 의문사 문제나 취업준비생의 고통,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감정에 대해 제가 웃으면서 답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동안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코미디 영화 하시는 감독님들 GV는 가보면 항상 재밌거든요. 질문도 재밌고, 답변도 재밌고.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웃는 그 경험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올해 하고있는 프로젝트를 일단 잘 마무리하고 싶단 생각 뿐이에요. 물론 심희섭 배우에게 2020년에 영화로 만들기로 한 약속도 꼭 지키고 싶고요. 2년밖에 안남았네요. (웃음) 그 때 다시 얘기하면 (심희섭 배우가) 안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약속한 거니까. 이뤄진다면 왠지 아름답지 않을까, 그거. 그런 마음입니다.


2022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하하, 근데 저는 심희섭도 심희섭이지만 함께 작업해주는 배우님들(박찬진, 하성훈, 최찬호, 임지호)에게 다 너무 고마워요. 원래는 제 욕심 때문에 영화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하지 않으면 정말 못살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고... 그래서 계속 영화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저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배우들인 것 같아요. 같이 작업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배우들에게 좀 많이 기대고 있는 상황이라, 가끔 도망치지 않을까 두렵긴 해요. 왜 연애를 할 때도 밀당이 필요한 법이잖아요. (웃음)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연출가 강진엽이 고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 다섯 편 ⓒ 헤아리는 사진기


# 인터뷰를 마치며


결국 배우 이야기로 시작해서 배우 이야기로 끝났다. 정말 자기 배우들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영화 한다고 목에 힘주지 않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도 늘 현장에서 즐겁지 않을까 싶다. 보다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음 번에 배우들을 만나 직접 들어봐야겠지만.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기사 하나를 더 공유 받았다. 강진엽 감독이 2016년에 인디포럼 영화제의 폐막식 진행을 맡아 대본을 썼는데, 우연히도 그 해 폐막식 사회자로 심희섭 배우가 발탁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맞춰지는 퍼즐 조각처럼 간절히 바라는 소원은 어떻게든 이뤄지는 법인가 보다. 이런 소소한 감동적인 순간들이 있기에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는 것 같다.


강진엽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약 그때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그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좋은 배우들을 만난 것처럼, 함께 어려운 길을 걸어갈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가정법 대신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는 것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아닌 그 어떤 종류의 도전일지라도. 던져볼 수밖에.


심희섭 배우에게 전달했다는 시놉시스가 매우 궁금했지만 비밀로 부쳐두기로 했다. 4년 뒤에 꼭 극장에서 영화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연출가 강진엽의 작품이 더 궁금하다면?

숲속필름 https://jinyeobfilms.modoo.at/

우리의 소원 https://www.tumblbug.com/newyearseve


시네필의 초상은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업계에 종사하지 않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글은 자유롭게 공유하셔도 좋지만, 사진 사용에 대해서는 아래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이메일로 문의 주세요.


인터뷰  전길중 정성은(비디오편의점) 윤동규(헤아리는 사진기)


헤아리는 사진기

인스타그램 @hae.pic

이메일주소 devin.yoon171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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