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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Apr 05. 2018

#02 사랑도 공포도 구원의 길이라네

상상에 빚지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야기꾼 안평의 보따리


이러다 인생 꼬이는 거 아니야?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이 회사 일은 도무지 내게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잘하는 건 이게 아닌데, 잘못된 길로 들어서버린 것 아닐까? 겁이 나서 영화를 버리고 회사로 왔건만, 새로운 두려움이 밀려와 괴롭힌다. 퇴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스페인 영화의 이해>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선생님 말 듣고 영화할 걸 그랬다고.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다며 찡찡대는 못난 글이었다.


보내지 말 걸 그랬나. 발송 버튼을 누르고 후회했다. 역시 밤에는 글을 쓰는 게 아니야.


이런 얘기를 했더니 비디오 편의점 사장님이 격하게 공감해주었다. 좋은 사람 같으니라고.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꼬박꼬박 통장에 월급 꽂히잖아.
나야말로 불안하지, 인생 꼬일까봐.


자신이 정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장님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나 보다. 함께 영화 <소공녀>를 보며 두 사람은 눈물을 쏟았다. 돈 잘 버는 회사원은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는 미소의 선택에 감동했고, 프리랜서 연출가는 미소에게 닥쳐온 가혹한 현실에 공감했다.


전고운, <소공녀> 스틸컷 (사진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무엇이 꼬인 인생일까. 하고 싶은 일 하다가 가난의 수렁에 빠지는 것? 삶의 안정감을 위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 이 사회에서 둘 다 가지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어쩌면 <시네필의 초상> 인터뷰는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명징한 해답은 찾지 못하더라도 인터뷰를 하는 우리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을 한 줌의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인터뷰 주인공으로 드라마 PD 시험을 준비 중인 안평을 만났다. '안평'은 그가 트위터와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별칭이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꾼이 풀어놓은 영화에 대한 생각들도 흥미로웠지만, 영화보다 본인의 삶에 대한 성찰과 다짐이 더욱 심금을 울렸다.


#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인터뷰하시기로 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영화 글을 꾸준히 쓰는 것도 아닌데. 인터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어제 명필름 랩 설명회에 다녀오긴 했는데. 하아...


한숨이 엄청 깊네요, 땅 꺼지겠어요. 


제가 요즘 고민이 많아서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신촌에서 만난 두 번째 주인공, 안평 ⓒ 헤아리는 사진기


원래 드라마 PD 시험 준비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2014년에 학교 수료한 뒤부터 준비했으니 벌써 네 번이나 지원했죠. 처음 방송국 시험을 치러 갔던 해에 엉겁결에 면접까지 간거예요. ‘오, 첫 시험인데 이렇게 면접까지 통과하는 걸 보면 가망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건데. 그게 저를 이렇게 지옥길로... (웃음)


슬럼프가 온 것 같기도 해요. 언론고시라는 게, 공부한 만큼 성과가 쌓이는 게 아니라 계속 이것저것 건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죠. 그런데 언제 채용 공고가 뜰지 모르니까, 하고 싶은 건 많아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영상을 찍고 싶다고 시험 준비를 놓아버렸다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글로 쓴 걸 구체화 하고 싶은 욕심은 많은데 말이죠.


발 아래 매트리스가 깔려 있으면 뛰어들었다가 망해도 괜찮은데...


지금 심정은 좀 절박하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려면 드라마 피디가 되어야겠는데, 길은 너무 좁고. 씨네 21에 지원했던 것도 비슷한 발버둥이었는데 잘 안 됐죠. 진짜 최선을 다해 준비했었는데.


학교 다닐 때도 영화나 영상을 많이 만드셨나요? 


영상보다도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갈리아의 딸들>로 연극을 올린 적이 있어요. 이야기가 너무 좋은데, 영상을 만드는 건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거죠. 사람도 많이 써야하고 장비 빌리는 것도 엄두가 안나고. 그래서 연극을 올린 거예요.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하고. 다른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모든 게 처음이라 실수도 많았지만 생각한 바를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내는 작업의 즐거움을 처음으로 맛본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연극 각본 말고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도 써보신 적 있어요? 


피디 시험 준비할 때 기획안만 엄청 많이 썼죠. 매번 시놉시스 단계까지만 쓰다보니까 저도 갈증이 있는 거예요! 기획안 이상으로 공을 들이고 구체화하고 싶은데, 그러자니 설정한 목표(방송국 PD 시험 준비)와는 어긋나게 되고.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요즘.


안평에게 상상력에 빚지는 삶이란? ⓒ 헤아리는 사진기


# 상상력에 빚지는 삶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하는 작품이 있었다면? 


<소공녀>를 얘기하고 싶긴 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동의가 안되는 이야기었어요.


어떤 점에서요? 


영화를 보고 소설 <소공녀>가 생각이 났어요. 각색한 작품은 아니란 걸 알지만, 계속 대비해서 보게 되더군요.


소설 <소공녀>에서 주인공 새라는 계속 상상을 하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자기 현실은 너무 힘든데, 스스로 공주라고 상상하면서 살아가죠. 하루는 길에서 동전을 줍는데, 그걸로 빵을 사서 거지에게 주는 거예요. 나도 배가 고프지만, 난 공주니까. 그게 새라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인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요. 참고 견딘 끝에 상상했던 행복한 미래가 선물로 주어지잖아요. 진짜 공주의 삶을 살게 되는.


<소공녀> 얘기로 한참을 떠드는 두 사람 ⓒ 헤아리는 사진기


그런데 전고운의 <소공녀>는 완전히 다르죠. 도래할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과 다른 나를 상상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만큼 벌고, 우선순위를 따져서 쓰고. 원하는 걸 찾아서 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상상이 없는 그 세계가 저는 무서운 거예요. 미소는 매우 훌륭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조차 마지막 프레임에 잡힐 때 너무 서글퍼보이는 거 있죠? 물질적 기반 없이 오랜 세월을 버티게 될 때,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원하는 걸 알고 그것을 행한다는 간단한 법칙이 미소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효하다. 그녀의 삶에는 상상은 물론이거니와 약속도 잘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약하며 현재의 결핍을 감수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낯설다.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이 돈을 벌어오겠다며 타국으로 떠날 때 그녀가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건, 그의 약속이 그녀의 세계에선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상상에 빚지며 산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전고운의 2018년형 <소공녀>보단 프랜시스 호지스 버넷의 1905년식 <소공녀>에 가깝다. 유물론적 토대 없는 삶을 믿지 않으면서 관념의 힘을 과하게 믿는다. 나는 아직 도래할 미래가 기대되고, 되지 못한 내가 너무 많이 남은 것만 같다.

그러나 올해, 그리고 올해 이후까지 오래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2018년식 소공녀 미소의 유물론적 태도와 1905년식 소공녀 새라의 관념적 태도를 모두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필요한 만큼의 노동을 해나가면서도 언젠가 도래할, 내가 약속했으므로 반드시 내 앞에 도래할 저너머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 것. 그 균형이 끝내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는다.

<안평의 영화일기> 중에서.


영화에서 한솔이 미소에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고 하잖아요. 그 대사가 뜬금없게 느껴졌는데, 말씀하신 걸 듣고 나니 그 말이 절절하게 와닿네요.


(영화 보기 전에) 엄청 기대했어요. 영화 보고 힘을 얻고 싶었거든요. 재밌고 산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거지. 웃을 수가 없는 거야. 엄청 웃긴 요소들은 많았는데. 인물들 하나 하나가 너무 재밌잖아요.


한솔이 “봄에 하자” 하던 그 장면도 진짜 웃겼는데. 


요령없는 것들. 옷을 왜 벗지? 꼭 옷을 벗어야 하나? (웃음) 상상력을 발휘해야지. (폭소) 언제 할거야. 여름엔 더워서 못하고. 저것들이 연애를 많이 못해본 거야.


듣다 보니 현정(키보드)이랑 말투가 비슷하네요. 김국희 배우님. 


와, 저는 그 캐릭터 보고 탄성을 질렀어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인 거예요. 대사 치는 타이밍도 정박이 아닌데 느낌이 진짜 좋고. 목소리 톤이랑 우는 연기까지 다. 유일무이한 캐릭터인데 한편으로는 실제로 어딘가 있을법한 좋은 친구 같아서 신기했어요. 진짜 좋은 친구.


미소를 따스하게 맞아주는 키보드 현정 (사진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인물들이 다 이해가 되더라고요. 밉지 않고. 


심지어 그 부잣집 친구까지. 사실 너무 공감이 됐어요. 미소야, 설마… 너 그 상황에서 언니의 과거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려고? 그런데 미소는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는 거죠. 자기는 그런 사람인 거니까.  


# 시네필이 아니면 어때


제가 인터뷰 하자고 했을 때, “저 시네필 아니에요!”라고 하셨죠? (웃음) 시네필임을 자칭하는 사람들도 연구 대상이지만, 시네필이라는 이름을 극구 부인하는 심리도 궁금했어요. 


약간의 부끄러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영화를 생각할 때 열등감도 좀 있는 것 같고. 제가 부산 출신인데, 고등학생 시절까지 영화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요. 대학와서 알게된 영화 좋아하는 친구들은 부산에서 왔다니까 갑자기 정성일 얘기를. (폭소)


정성일 평론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었을 때도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고다르 영화를 보다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었다고 말씀 하시잖아요. 영화를 카메라로 찍는 걸 발견했다는 그 유명한 일화. 그게 너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열등감이 들더라고요.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영화도 많이 본 적 없고, P2P로 다운받는 흔한 영화들만 보던 사람인데.

 

트위터 하다보면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지 않아요? 세상에 무슨 시네필이 이렇게 많아? (웃음)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느꼈어요. 난 진짜 무지하구나. 영화를 서사 중심에서 벗어나서 볼 수 있다는 걸 잘 몰랐던 거죠. 힙합을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거든요. 가사와 라임만 듣다가 플로우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서사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 자체를 볼 수도 있는 거구나.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놀란 거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고 더 알아가고 싶은데! 100년 전부터 영화에 대해 깨우친 것 같은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좀 무섭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더 포스트>를 봤을 때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내용은 재미있는데 어떤 부분에선 미진하다든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한두 문장으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거죠! 역시 100년 정도 수행해서 시네마테크 직원이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되어야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건가. (웃음) 한 편으로는 무서운데,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나는 '진짜' 시네필일까? ⓒ 헤아리는 사진기


지금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세요? 


쿨하고 멋진 듀나식 말투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웃음) 아닌 걸 어떡해요. 김혜리 기자가 했던 말 같은데, 어떤 영화를 보던지 보기 전보다는 본 후가 더 낫대요. 아무리 나쁜 영화를 봐도 새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에게 들어오는 거니까. 저는 그걸 믿는 사람이고 그걸 위해 영화를 보는 건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죠.


누구나 정성일처럼 될 수는 없잖아요. 물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거의 미쳐있잖아요. 친구도 없어 보일 정도로. (웃음) 그런데 저는 아니거든요. 내 삶의 풍족과 평안을 위해 영화를 보는 건데.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을 흉내내고 있는 게 아닐까?


멋있어보이고 싶은가 봐요. (웃음) 트위터에 한 줄 쓰면서도 글이 어떻게 보일지 윤문하고 각색하게 되는데. 거기엔 김혜리이면서, 정성일이면서, 허문영이고 싶은 아주 이상하고 복합적인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정확한 지적이신 것 같아요. 


비틀린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 <로건 럭키>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영화가 되게 지루했거든요. 그런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평이 다 좋더라고요. 사실 정답이 있는 건 아닌데.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좋은 작품을 알아볼 안목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그것도 내 모습인데?’ 하고 인정해보려고 해요.


글을 쓰고 말할 수 있는 창구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자기만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곳으로 계속 나아가야하는 것 아닌가. 아, 스트레스가 은근 많았나봐요.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나의 유일한 독자는 언니(비디오 편의점 사장님)뿐이고. (웃음)


시네필의 초상 두 번째 인터뷰 ⓒ 헤아리는 사진기


김혜리 기자님 글 혹시 좋아하세요? 


진짜 좋아해요. 영화에 대한 글이기 전에, 문장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시는 게 느껴지거든요. 제가 쓰고 싶은 글과 비슷한 것 같았어요. 어떤 감각을 딱 집어내서, 자신이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정말 닮고 싶은 건 허문영 씨의 글쓰기죠. 처음 평론집을 봤을 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좋지? 너무 훌륭하다. 나도 이렇게 느끼는 게 있었는데 왜 이렇게 못썼지? 이렇게 자기 방향을 힘있게 밀고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혼자는 절대 못할 것 같아서 영화 모임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다보니, 여성주의적 감수성과 그걸 기반으로 합의된 규칙이 전제되지 않은 시네필 모임은 좀 힘들기도 하더라고요. 최근에는 씨네 키튼(부산 지역의 영화 스터디)의 글들을 계속 보고 있어요.


(비디오 편의점 사장님) “다음 인터뷰는 허문영 씨랑 할까?”


안 돼, 프로페셔널이잖아.  


그래! 프로페셔널 뜻 모르냐. (웃음)


사실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경계도 좀 허물고 싶긴 해요. 


프로페셔널이든 아마추어든 중요한 건 모르는 걸 인정하는 태도인 것 같아요. 1초만에 인정하기. 바로 인정 안 하면 뜸들이다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잖아요. (웃음) 나는 그거 잘 몰라, 하고 주도권을 바로 넘겨주는 태도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아요. 사람들은 다 제가 독서광이라고 믿고 있는데. <오만과 편견>을 정확하게 완독한 적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인정할 수 있을까?

 

시네필의 초상 두 번째 인터뷰 ⓒ 헤아리는 사진기


영화도 문학만큼 양 극단으로 진영이 나뉘어있는 것 같아요. 대중영화만 즐겨보는 사람들과 시네필들로 갈라진 기묘한 지형. 저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하면서 그 사이를 방황하는 중이죠. 인터뷰하려고 하는 게 그런 사람들 아니에요?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영화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상징을 찾아내려 하는 영화광들을 경멸하다가도 어느 순간 저 역시 영화를 마구 분석하고 있고. 그러다가 스스로를 약간 경멸하게 되기도 하고. (웃음)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그게 제일 편한 방식이거든요. 신문사 인턴하면서 기사 쓸 때도 그랬거든요. 한때는 그런 방식의 취재와 작법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 일기를 쓰는) 김혜리 기자는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하면서 내 글쓰기는 왜? 스스로에 대한 좀 더 강한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누가 뭐래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를 적어보도록 해요. 


오, 그거 진짜 좋네요.


# 공포에 매혹당한 사람들


안평이라는 닉네임은 무슨 뜻인가요? 


방송국 합숙 면접 갔을 때 안평대군에 대한 드라마 기획안을 쓴 적이 있어요. 늘 안평대군은 훌륭함에 비해 잘 다뤄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사람인데, 정치적인 임팩트가 없다는 이유로 묻혀버린 사람.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안평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이잖아요. 안평은 그 꿈에 나온 사람들에게마저 배신당한 사람이거든요. 그의 이야기에 애착이 가서 지금껏 계속 쓰고 있어요. 이제 친구들도 본명 대신 안평이라고 부르곤 해요.

 

안평이 고른,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다섯 편 (무순) ⓒ 헤아리는 사진기


<장화, 홍련>에 대해 글을 쓰신 것도 봤어요. 영화의 어떤 점을 좋아하시나요? 


완전히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배우를 보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순간. <장화, 홍련>에서 문근영이 집안 마당에서 꽈리를 따서 먹는 장면 있잖아요. 그 모습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렸어요. 홀린 것 같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문근영 팬까페도 가입했는데. (웃음) 불쌍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처음으로 덕질을 했던 영화인 것 같아요. 문근영도 꽤 오래 좋아했어요. 그런데 다음 필모들이 별로였거든요. 영화보고 맨날 울면서 집에 갔던 것 같아요. <어린 신부>와 <댄서의 순정>까진 의리로 봤는데, <사랑 따위 필요 없어>에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죠. (웃음)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우디 앨런 영화 중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어떤 영화인가요?. 


남편이 노동자인 여자 주인공은 삶에 낙이 별로 없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맨날 영화관에 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스크린에서 배우가 튀어 나오게 되는데,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이야기에요. 왜 영화를 보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영화였던 것 같아요. 영화의 마법이 즐거움을 잊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극장에서 나갈 수밖에 없는 슬픔. 계속 꿈만 꿀 수는 없잖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관의 풍경이 나오는 영화 좋아해요. 꿈 속의 꿈 같은.


우디 앨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스틸컷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박찬욱의 <박쥐>를 리스트에 꼽으셨는데)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도 좋아하시나요? 


<박쥐>도 저를 완전히 매료시킨 영화였던 것 같아요. ‘나를 매혹시킨 영화의 리스트’로 제목을 바꿔야겠네요. (웃음) 박찬욱의 스타일을 좋아해요. 세상의 모든 이상함을 모아놓은 것 같은 영화들.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좋지만 그 중에서도 <박쥐>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깜짝 놀라게 하는 호러 말고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두려움의 정서. 촌스럽지 않은 호러라서 좋습니다. 세련된 공포요.


왜 공포라는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요? 


결국 다 공포라고 생각하거든요. 두려워하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죽을까봐 두려워하고. 그런 게 우리 정서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처럼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랑보다는 공포가 핵심을 더 잘 건드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랑이 구원하는 이야기도 정말 좋아해요. 예를 들면 <밀회>.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입니다!) 유아인 님 때문에 다시는 못볼 것 같지만. (웃음) 사람이 바뀐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자기 세계를 부수고 나오게 하는 건 결국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 헤아리는 사진기


저는 영화를 하고 싶은 이유가, 촌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결국 기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아요.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 거예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거기다가 제가 할 줄 아는 것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죠.


저는 사실보다는 거짓을 말하는데 더 능한 사람이라 영화나 드라마를 하고 싶어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좋은 이야기는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거든요. 결국 (그 감동을) 내일 잊게 될지라도 어떤 이야기가 내 안에 들어오는 그 날, 그 순간에는 누구나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곤 하잖아요. 그 시간들이 쌓여 변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기대가 있어요. 특히 영상은 책보다 그 효과가 더 강렬하잖아요. 직관적이기도 하고요. 유려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어쨌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라고 믿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거죠.


그게 안평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군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 속의 공포를 인정하고 극복하는 거 아닐까 싶어요. 저는 제 자신이 겁이 많다는 걸 인정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인터뷰를 하기 전에 씨네필이 뭘까, 나한테 영화는 뭘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동안 제 속의 두려움에 대해 좀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이제는 ‘진짜’ 씨네필이 아닐까봐 영화에 대해 덜 이야기하거나, 제가 내놓는 작품이 모두를 매료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워 창작을 망설이는 건 그만두려고요. 나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포’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작업들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꼭 (사진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 인터뷰를 마치며


정답만 요구하는 세상에서, 어떤 평가도 유보한 채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안평의 모습은 영화 <소공녀>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 미소처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솔이처럼 (혹은 안평처럼) 상상에 빚지는 삶도 괜찮아.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이야기를 하는 그녀도, 듣던 우리도 저마다의 두려움을 조금씩 내려놓은 듯했다. 현실에서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같이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꼭.


며칠 뒤, 교수님께 답장이 왔다. 이메일을 열어보고 왈칵 눈물이 났다.


"사람은 도저히 물리적으로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갖는단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가능성을 하나, 둘 포기해 가는 거고. 그런 면에서 아픔이 있지. 다만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O/X의 문제가 아니니까, 어느 길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또는 인생의 구원)의 가능성은 있는 법이니까, 너무 괴롭게 고민하지는 말기 바란다."


꿈을 꾸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당신.
세상이라는 스크린 위를 흐르는
그 어떤 상상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안평의 글과 생각이 더 궁금하다면?

<로건 럭키>에 대한 브런치 무비 패스 https://brunch.co.kr/@anpyung/8

내 인생의 영화 <장화, 홍련>에 대한 글 https://brunch.co.kr/@anpyung/4


시네필의 초상은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업계에 종사하지 않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글은 자유롭게 공유하셔도 좋지만, 사진 사용에 대해서는 아래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이메일로 문의 주세요.


인터뷰  전길중 정성은(비디오편의점) 윤동규(헤아리는 사진기)

이메일주소 connected.jeon@gmail.com


헤아리는 사진기

인스타그램 @hae.pic

이메일주소 devin.yoon171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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