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한 예비 기자 이춘희의 영화 수행법
놀랄만한 변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였다. 고백건대, 시네필이 되겠답시고 한국 영화를 업신여긴 마음도 없진 않았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의 힘겨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영화관에서까지 이 헬조선의 고통과 마주해야 하는가. 좋다고 소문난 해외 영화들을 골라보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던 나날이었다.
제발 한국 영화 한 편만 보자, 쫌!
비디오 편의점 사장님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댔다. 자기가 좋은 한국 영화를 소개하여줄 테니 한 편만 같이 봐달라 했다. 물론 난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엄청난 시네필이라며 내게 소개하여준 친구가 <시네필의 초상> 세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 이춘희였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기자 지망생답게 박식하기도 했지만, 정말 영화를 많이 보고 많이 아는 '영잘알'이기도 하다. 우연히 같은 영화모임에 나가게 되면서 같이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았다. 영화가 끝나면 늦은 밤까지 수다가 이어지곤 했다. (쓰고 나니 뭔가 로맨틱해버려....!)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한국 독립영화를 정말 많이 본다는 점이었다. 영화제에 갈 때도 여러 편의 한국 영화를 고르곤 했고, 개봉하는 독립영화들도 빠지지 않고 챙겨본다. 무엇보다 GV를 정말 열심히 다닌다. 특히 김새벽 배우의 열렬한 팬이라 김새벽 GV는 놓치는 법이 없다! 그를 따라다닌 덕에 독립영화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월호 이후의 영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언젠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이제 겨우 한국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한 나로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분명한 건, 적어도 영화를 보는 나는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속 편하자고 마주하길 포기했던 한국 사회의 민낯들. 그러나 세월호만큼은 더 이상 피해갈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그날 이후로 종종 자문하게 된다. 언젠가 차이밍량도 반문하지 않았던가. 파란 하늘을 두고 대체 왜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냐고. 우리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그가 목포 신항에서 열린 세월호 4주기 추모식에 다녀오느라 우리의 만남은 한 주 늦어졌다. 어떤 정답을 구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영화에 대한 수다가 이어졌다.
기자 시험 준비는 잘 되시는지요.
지난번 시험도 망했으니 영화 이야기만 하도록 합시다. (속상)
여전히 한국 독립 영화를 많이 챙겨보시는 것 같던데요.
한국 영화를 의식적으로 많이 챙겨보는 건 아니에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 중에 여러 이유로 한국 영화를 기피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가려보는 편은 아니라서요. 영화에 대한 정보나 줄거리가 있으면 쓱 훑어본 다음, 끌리면 보고 아니면 마는 거죠. 요즘엔 더빙 검수 알바를 하느라 미국 영화를 질리도록 보고 있습니다. (웃음)
최근에 보신 영화 중에 좋았던 작품은 어떤 게 있었나요?
어제 본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그리고 그저께 본 <수성못>. 특히 <수성못>이 좋았어요. 좋았다, 는 표현을 쓰기에는 좀 찜찜하지만. 영화 전반을 죽음의 기운이 감싸고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어요. 새벽 누나가 GV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 읽었던 건데. (웃음) 주인공의 우울과 요절이 이해가 되면서도,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양가적인 생각이 들었죠.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멀리해야 하는 감정이지만 감싸주고 싶어 지는 마음. 마찬가지로 <수성못> 속 주인공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지만, 그게 우리가 직면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거죠. 작위적인 희망을 배제한 점이 좋았어요, 감정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
다양한 영화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한국 독립영화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꼭 한국 영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데요. 극장에 걸리는 상업 영화를 보면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는 거의 없잖아요. 범죄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맨스 영화들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죠. 반면 독립 영화는 상대적으로 스펙터클이나 비일상성을 동원하는 경우가 드물잖아요. 예산 때문인 경우도 많지만요.
독립 영화는 감독 자신이 처한 문제에서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경우가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김대환 감독의 경우, <철원기행>이나 <초행> 모두 자기 가족의 문제를 서사에 끌어들인 다음 영화 안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려는 시도잖아요. 그런 영화들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감독이 고민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제가 가진 문제들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듯해요.
듣자 하니 <초행>은 김새벽 배우에 대한 팬심으로 무한 반복해서 보셨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웃음) 그리고 <초행>은 극장에서만 본 걸로 치면 여덟 번 밖에 안된다고요. (우와)
김새벽 배우님은 언제 처음 알게 되셨나요?
2015년 6월 12일 겁니다. (웃음)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그게 <한여름의 판타지아> 개봉 다음 날 GV였기 때문이죠. 근데 너무 김새벽 덕후처럼 인터뷰를 몰아가는 거 아닙니까. (웃음)
김새벽 배우님의 가장 큰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초행>의 지영이 새벽 누나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민이 많은 사람이지만, 내면에는 단단한 중심이 버티고 있는 것 같달까. 행여나 많이 흔들려도 그 단단함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계속 보고 싶은 거죠. <한여름의 판타지아> 뿐만 아니라 <얼굴들>이나 <줄탁동시>에서도 비슷한 캐릭터였고. <그 후>의 창숙은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나서 촬영지인 (일본의) 고조 시에도 다녀오셨다고.
물론 로맨스를 기대한 건 아니고요. (웃음) 그건 장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어요. <리틀 포레스트> 일본판이나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면서 느낀 게, 농촌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영화적 시각이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한국에서 시골 마을을 다룰 때의 전형이 있잖아요. 흔히 농촌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전원일기>식의 무드들이 재생산되거나, <마파도>처럼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로 쓰이거나. <한여름의 판타지아>처럼 맑은 느낌으로 농촌을 그린 경우는 별로 못 본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맑다'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맑다는 건 뭘까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시선의 문제인 것 같아요. 쉽게 단정 짓거나 판단하지 않는 태도? 예를 들자면 <땐뽀걸즈>가 맑다는 느낌을 준 영화였어요. 예컨대 영화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미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그리지도 않아요.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캐릭터를 살려서 담아내는 거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무엇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니까요. 세르주 다네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영화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 시선의 거리를 알려주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화제에 갈 때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사를 다룬 영화들을 챙겨보려 합니다.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우고 싶기 때문인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자크 리베트가 <천함의 대하여>에서 비판했던 고통의 전시를 피하면서 어떻게 사건을 재현할 것인가. 어떤 재현은 윤리적이고, 어떤 재현은 비윤리적인가. 예를 들어 <사울의 아들>에서는 참사의 현장을 아웃 포커싱 처리하고 사운드만 들려주잖아요. 폰테코르보의 트래블링 숏과는 정말 반대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의 연출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상상을 맡겨버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잔인한 참상을 이미지로 보여주느냐 마느냐가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울의 아들>은 그런 점에서 미묘한 작품이에요. 분명 감독이 윤리적인 노력을 한 지점이 있고, 그래서 윤리적인 연출 방식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요.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참 어렵네요.
최근 개봉한 세월호를 다룬 영화들은 어떻게 보셨나요?
4.16 미디어 연대에서 만든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와 오멸 감독의 <눈꺼풀>을 보았습니다.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는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세월호 사고가 난 뒤 일주일 정도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배제하려고 했었어요. 결국 지금처럼 되고 말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몇 년이 지나도 진실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을 거고, 우리 사회도 그냥 비슷한 모습일 거라고.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몇 달 지나고 안산에서부터 유가족들과 학생들이 행진할 때, 그걸 본 후로 세월호를 보는 게 진짜 힘들어졌어요. 생각하다 울음이 날 때도 있었고. 그래서 <공동의 기억 : 트라우마>는 정말 힘든 영화였어요. 감정이 폭발했달까요. 영화를 보는 한 시간 반 내내 많이 울었어요.
세월호는 아직 다큐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진실도 다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까. 오멸의 <눈꺼풀>은 이미지 중심의 영화다보니 이런 지점이 크게 문제가 되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제주 4. 3 사건을 재현한 <지슬>이 비윤리적인 작품으로 느껴진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 차이가 뭘까, 궁금해서 GV에서 오멸 감독님께 어떤 윤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시는지 여쭤봤어요.
오멸 감독의 답변은, 영화를 만들 때만 그것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평소의 삶 속에서 윤리적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 윤리적 태도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의식적으로 변증하려고 하면 오히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납득이 갔어요.
선문답 같은 말처럼 들리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기자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세월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보도를 할 수 있었을지 수없이 생각해봤는데요. 얼마나 다른 보도를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세월호 이후에 새로이 보도 매뉴얼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사실 그 전에도 매뉴얼은 있었는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게 문제잖아요?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윤리적인 태도가 바로 실천될 수 없고, 평소에도 이를 몸에 익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겠죠.
<눈꺼풀>의 미륵도 노인이 수행하던 것처럼.
수행, 수행이 필요합니다.
서울/경기 시네필 모임 OR 활동을 함께하고 계신데요. 영화 모임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누벨바그에 대한 동경이 늘 있죠. (웃음) 동인을 형성하여 평론을 써내고, <까이에 뒤 시네마>를 이끌고, 영화를 만들던 시절. 제 자신의 창의력을 불신하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지만,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영화를 보고 함께 얘기를 나눌 영화 친구를 만나고 싶기도 했고요.
시네필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의식 과잉을 내포한 단어인 건 사실이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40년 전 프랑스의 시네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봐도 똑같아요. 영화를 보며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들. (영화광을) 한량처럼 보는 시각도 다를 바 없었지요.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도 어떻게 보면 사실 백수 같잖아요. (웃음) 친구들끼리 모여서 영화 보고, 글 쓰고. 그런 이미지들이 여전히 시네필이라는 단어에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영화 친구들이 소중한 것 같아요. 영화 때문에 현실로부터 고립되지 않도록, 함께 할 친구들.
예비 저널리스트로서, 영화를 왜 보시나요?
또 한 번 세르주 다네를 인용하자면... 이러다가 세르주 다네 전문가인척 한다고 욕 먹겠어요. (웃음) 프랑스어를 통한 언어 유희인 건데, 시네필(Cine-Phile)하고 동일하게 발음되는 시네필(Cine-Fils)이라는 말을 다네가 썼거든요. 해석하자면 '영화 아이'라는 뜻이죠. 영화를 통해서 삶의 양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워나가는 아이인 셈이죠. 제가 생각하는 영화와 나의 관계와 가장 유사한 것 같아요.
영화와 함께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영화를 통해 그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해나가는 영화 아이. 그게 시네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 <수성못>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내뱉은 단어들. 모르겠다, 어렵다, 쉽지 않다. 윤리적 태도와 시선이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 우리는 무지(無知)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영화 <수성못>을 보았다.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형체를 붙잡을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절망한다. 까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어느 시 한 구절을 재인용하자면 이것은 '삶의 단순함과 죽음의 복잡함이, 삶의 복잡함과 죽음의 단순함에 맞서 벌이는 영원이라는 이름의 게임'이다.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삶의 난수 게임과 불현듯 닥쳐오는 캄캄한 죽음의 어둠 앞에서 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무력하게 담배를 피고 있는 희준에게 다가온 한 여자. 얼굴이 맑아보이신다며 말을 건네자 희준은 도에 관심 없다며 그녀를 밀쳐낸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면 삶이 움직인다는 여자의 말에 멈칫하는 희준.
삶이 움직여? 그거 재밌네
삶과 영화의 공통점. 옳은 방향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움직임을 가능한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 그 뿐 아닐까. 안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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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길중 선민 동규(헤아리는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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