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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Apr 28. 2018

재재는 자신이 곧 하나의 세계임을 영화를 통해 확인한다

이건욱(2017), <재재월드>

* 이 글은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월례비행 리뷰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http://www.indieforum.org/xe/index.php?mid=review&page=2&document_srl=357780)


영화는 방 한 구석을 비추던 카메라가 서서히 패닝하면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널브러진 물건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움직인다. 수평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수평으로 패닝(Panning)하는 카메라


부채꼴의 크기를 보니, 카메라로 볼 수 있는 건 세상의 일부뿐이구나. 참 작다! 그래서 열심히 좌우로 움직여보지만 이 방 전체를 담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인 재재는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단순한 도식화나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곧 세상이라고 믿고 산다. 저 작은 부채꼴을 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 때도 많다. 더 큰 문제는 자기가 만든 세상이라는 영화에서 정작 스스로가 소외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성찰이란 거리를 필요로 하는 법인데,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일치할 때 우리는 자기연민 혹은 자아도취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어떻게 하면 이 조그마한 부채꼴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갑자기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이건욱의 <재재월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나(응시의 주체)와 나(응시의 대상)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영화가 가장 독창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재재월드>의 멈춰 선 카메라는 같은 공간을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영화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앵글샷의 데쿠파주와는 차이가 있다. 아래의 두 그림을 비교해보자.


일반적인 영화의 데쿠파주(좌)와 <재재월드>의 카메라들(우)


왼쪽의 그림은 일반적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대의 카메라(혹은 여러 개의 쇼트)들이다. 일반적으로 세 개의 장면은 선형의 시간 위에서 순차적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실 첫 번째 그림의 변형에 불과하다. 오른쪽의 그림은 <재재월드>를 보고 나서 그린 그림이다. 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운드다. 일반적인 데쿠파주 편집에서는 영상이 바뀌어도 소리는 매끄럽게 이어 붙인다. 그런데 <재재월드>에서는 같은 공간을 찍었지만 사운드가 제각각 다르다. 희미하게 들리던 바람소리가 갑자기 커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뚝 끊긴다. 음성의 변화는 두 가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첫 번째, 원근감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 기차가 멀어질 때 점점 작아지는 소리. 두 번째, 시간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쇼트에서 시간은 분절적으로 흐르는 것만 같다. 몽타주를 통해 시선의 주체를 분산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쪼개고 나니 비로소 영화 안에 재재가 들어설 공간이 생겼다.


영화의 감독인 이건욱은 스스로 (카메라 안과 밖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재재월드>는 이건욱 감독이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응시하려는 시도이다.


카메라 바깥의 재재(좌)와 카메라 앞에 선 재재(우)


스크린 바깥에서 직접 카메라를 들 때(왼쪽 그림) 재재는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이라는 영화 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시도. 그러나 흔들리는 카메라는 좀처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결국 그는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오른쪽 그림)뿐이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만남의 순간을 보여줄 때 미묘하게 시공간을 뒤틀어놓는다. 예컨대 카메라를 정면을 응시하는 꿈 속의 소녀, 혹은 외계에서 온 여인. 물론 가장 이상한 시퀀스는 재재의 얼굴과 여러 여인들의 얼굴의 교차 편집이다. 배경의 벽 색깔 때문에 모두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들이 동시에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몽타주의 순간들은 만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결이라고 부르고 싶다. 느슨하게 이어진 서로 다른 시공간의 얼굴들.


<재재월드> 속 수많은 얼굴들 (사진 출처 : 인디포럼 작가회의)


불교의 연기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방식의 편집은 말하자면 <재재월드>에서의 존재 방식으로 확장된다. 한 소녀가 나타나 재재에게 물고기를 건네어 준다. 재재는 열심히 생선을 먹는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매개를 통한 연결. 그러다 갑자기 소녀가 사라진다. 문득 우리는 그 물고기 소녀가 재재의 몸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타자와의 만남, 세계와의 만남이 단순한 연결을 넘어 자아의 확장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재재가 주운 녹음기에서 한 여성이 여름으로 오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가 여름 그 자체를 홍보하는 듯하다고 했다. 재재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름으로 향한다. 항상 물기에 젖어있고, 곁에 있기만 해도 땀이 나게 만드는 그녀는 마치 여름 그 자체와 같다.


부채꼴이 비로소 온전한 원이 되었다


<재재월드>의 기묘한 몽타주가 보여주는 연결을 통한 자아의 확장은 “나 = 세계” 라는 등식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여름 속에 사는 그녀가 곧 여름 그 자체인 것처럼. 영화의 끝에 재재가 카메라로 거울 속 자신을 비추는 장면, 그리고 재재가 창밖을 내다보는 마지막 컷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내가 속한 세계가 일치할 때, 비로소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재재는 나 자신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임을 영화를 통해 확인한다. 인류학 입문서 중에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이 영화의 부제로도 어울리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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