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현(2017), <얼굴들>
* 이 글은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월례비행 리뷰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http://www.indieforum.org/xe/index.php?mid=review&document_srl=359655)
파사드(Façade)란 프랑스어로 정면이나 겉모습을 뜻한다. 건축물의 의미 혹은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외관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미디어 파사드 작업이 많아지면서 빌딩의 외벽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영사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건축물의 얼굴은 저마다의 의미가 흘러가는 스크린으로 작동해왔다. 오래된 성당의 정면을 떠올려보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파사드를 보았을 때 우리가 읽어내는 메시지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수백 년 전 탄생한 이미지가 긴 시간의 공백을 지나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
이강현의 <얼굴들>은 다양한 방식의 재현과 지연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이미지의 실재와 카메라를 통한 재현 사이에 흐르는, 절대로 건너갈 수 없는 시간의 강. 재현된 이미지의 한계에 몸소 부딪치고 저항해보기 위한 실험처럼 보이는 그의 첫 극영화는, 도착의 지연이라는 영화적 시간의 속성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감각적 체험이다.
행정실 직원인 기선은 축구부인 진수의 얼굴을 사진으로 처음 보게 된다. 그 후, 기선은 이상하리만큼 진수에게 집착한다. 그의 일상에 대해 알고자 하고,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진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의 노력은 진수에게 닿지 못한다. 진수의 진짜 모습, 즉 맨 얼굴을 보기 위한 기선의 행위는 다소 폭력적이다. 그는 그가 원할 때 축구부에 불쑥 찾아가고, 동의도 없이 진수네 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난다. 심지어 개인 사물함의 자물쇠를 부숴 열어보기까지 한다. 이러한 기선의 모습들은 맨 얼굴, 즉 이미지의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다.
식당을 차리기 위해 어머니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온 혜진 역시 실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식당 사업을 구상하면서 이 동네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어떤 메뉴가 잘 팔리는지 식당들을 직접 다녀보고,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보기도 한다. 식당 인테리어를 위한 인부들도 직접 만나본다. 기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노력 역시 실패하기 일쑤다. 부동산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녀는 번번히 가로막힌다. 이미지의 실재는 혜진이 부동산에서 시도한 것처럼 질문 몇 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테리어를 직접 하겠다고 인부들을 불렀지만, 결국 얼굴도 모르는 누가 바닥에 발라놓은 시멘트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이러한 좌절에 부딪쳤을 때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의 차이가 흥미롭다. 대표적인 두 개의 장면을 비교해보자. 진수가 팔이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선은 축구부 코치를 찾아가 대뜸 화를 낸다. 왜? 이미 그의 상상 속 스크린에서는 재현된 이미지의 서사가 굴러가고 있다. '몸에 상처도 많고, 팔을 저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도대체 얘는 뭘 하고 다니는 애야?' 코치가 운동하다가 다쳤다고 말해도 기선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결국 기선은 진실에 접근하는데 실패한다. 반면 혜진은 질문하는 사람이다. 식당 점원은 자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자리가 없는 것인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식당 밖으로 쫓겨나온 혜진은 다시 들어가 묻는다. "진짜 자리가 없는 거예요, 아니면 한 사람이라서 안 되는 거예요?" 부동산에서도, 인테리어를 할 때도 혜진의 질문은 번번히 거부 혹은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위한 자리로 안내를 받는다.
지금 영화를 보는 우리는 어떠한가? 기선이 진수의 사물함을 열어본 다음부터 이어지는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기선이 사물함에서 큰 파이프 렌치를 발견한 다음(A), 진수와 통화(B)를 한다. 그 다음 영화는 갑자기 병원에서 기선과 혜진이 만나는 장면(C)을 보여주고, 그 뒤로 금고를 깨부수는 진수의 모습(D)이 붙는다.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있던 기선(E)이 고개를 든다. 파이프 렌치를 발견하고 진수와 통화하는 장면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 다음 왜 바로 진수의 행동(D)를 보여주지 않고 회상 씬(C)을 삽입했을까? (C)의 장면은 (D)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기선의 상상 속에서 상영되는 장면임을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신호처럼 보인다. 기선은 이번에도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제멋대로 뇌의 스크린에서 이미지를 재현해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진수가 금고를 훔쳤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앞뒤로 등장한 이미지들에 의한 효과다. 진수가 친구에게 금고에 대해 물어본 장면, 철조망이 둘러진 담벼락을 기웃거리던 모습, 이사온 새 집을 청소하는 이미지 등이 모여서 진수가 부잣집 금고를 훔쳐 집을 구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영악한 편집의 힘이다.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에 대한 기만에 그쳤을 텐데, 영화는 뒤늦게 도착한 진수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정말 진수가 그랬을까?
"사소한 움직임에도 요동치는 마음 / 여운을 남기며 허공에서 멈춰버린 추억들 / 언젠가 우리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이 시간, 이 떨림"
학교를 그만둔 기선은 회사 사보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 처음 만난 사진작가는 사보를 만드는 건 카테고리, 즉 삶의 포인트들을 되짚어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즐거워할 것, 설렐 것, 감동할 것. 오늘날 극장에서 상영되는 많은 영화들 역시 우리가 종종 잊고 사는 삶의 감각들을 정형화된 이미지로 재현해낸다.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에 몰입하면서 자연스레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되는 감정들 또한 결국 "여운을 남기며 허공에서 멈춰버리고" 마는 것이다.
<얼굴들>에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많다. 예를 들어 진수가 언덕에서 신발끈을 묶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병원에서 만난 혜진이 기선에게 신발끈을 묶으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무덤가에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진수를 보고 화성에서 선크림을 펴바르던 혜진을 생각하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기시감이란 뒤늦게 도착한 이미지들이 불러 일으키는 지나간 감각들이다. 주문한 지 일주일 뒤에 도착한 택배를 받아보거나, 며칠 전에 보냈던 나의 사연을 라디오에서 듣게 될 때 느끼게 되는 생경함. 진수는 "얼굴만 보면 다 안다"고 했지만, 앞서 기선과 혜진의 모습에서 보듯이 우리는 매번 얼굴들을 놓치고 만다. 학교를 떠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진수를 만난 기선처럼, 시간의 지연을 통해 이미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행위는 세상의 맨 얼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인 셈이다.
꼭 그것만이 유일한 길인가? 영화는 반문한다. 고장난 네비게이션처럼 이미지가 멀리 달아날 때, 혜진은 곧바로 그것을 쫓아 빠르게 움직인다. 뭐든지 직접 보고 듣고 먹어보는 그녀에겐 같은 이미지에 대한 반복적인 성찰 이전에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밤마다 식초를 들이키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미감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처음엔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쳤던 에어로빅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신나게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살아난 생의 감각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마침내 (다소 클리셰 같은 장면이긴 했지만) 식초의 인위적인 자극이 아닌 사과 본연의 맛을 알게 된 그녀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양념 종지들을 치워버린다.
영화관의 스크린, 상상 속의 스크린, 수많은 얼굴들과 세상이라는 스크린.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영화 속 대사처럼) 세상엔 볼 것이 너무 많고, 우리는 이미지의 미로 속에서 시간 관념을 잃고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길가에 멍하게 선 기선의 마지막 모습처럼. 지금 이 순간(Very this moment)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부단히 움직여보고 질문해볼 수 밖에 없다. <얼굴들>은 이미지의 재현과 시간의 지연을 통해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고 마는 시간에 대한 의식적인 감각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영화적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