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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Jun 02. 2019

보는 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우리에게 <기생충>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

*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쾌한 가난 포르노그라피


시놉시스만 읽어봐도 <기생충>은 계급에 대한 영화다. 대저택에 사는 박 사장 가족과 반지하에서 올라온 전원백수 가족의 만남이라는 이야기의 구조만 보아도 대략적인 내용은 짐작이 된다. 두 가족 간의 빈부격차는 극명하게 차이가 날 것이며, 그 간극이 벌어질수록 전원백수 가족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전개는 이러한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뻔할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뻔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봉준호 감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반응이었다. 희망도 대안도 없이 가난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어둡고 절망적인 결말이긴 했지만, 아무런 정치적 제언 없는 포르노그라피라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 <기생충>은 다소 난처한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찜찜한 마음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런데 무엇이 왜 불편하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같은 이유 모를 난처함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봉준호 감독이 추구하는 정치적 미학의 일부분이자 <기생충>의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말 블랙 코미디일까?

 

영화를 보는 동안 객석에서 여러 차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웃긴 장면들도 있었으나 정말 기괴한 폭소의 순간들이 있었다. 가령 지하실에서 문광의 남편이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하다가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 찰나의 순간 관객들이 웃은 이유는 기사식당에서 기택 부부가 나눴던 대화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처지의 두 가족이 서로를 멸시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장면. 테이블 밑에 기택 가족이 숨어있는지 모르는 박 사장 부부가 기택의 냄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택은 티셔츠 목덜미를 끌어올려 냄새를 맡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냄새나는지 맡아보는 것 봐." 하고 웃는 사람들. 기택 가족의 비참함이 정점을 찍는 그 장면에서 그들을 같이 조롱할 수 있는 "박 사장"들이 극장에 그렇게 많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마냥 웃기엔 누군가에겐 가혹한 현실이다. (사진 출처 : 씨네21)


봉준호의 전작들이 그러했듯이, <기생충>에도 수많은 리얼리티의 디테일이 녹아있다. 우리가 영화 속 가난의 디테일을 보며 웃을 수 있는 건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영업을 하다 궁지에 내몰린 적이 있거나 친구에게 반지하에 산다고 놀림당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이 영화를 보며 마냥 웃을 수 있을까? 픽션인데 뭐 어때, 라고 웃어 넘기기엔 너무나 가혹한 리얼리티다.


쾌적한 영화관 안에서 우리는 웃으며 빈곤의 디테일을 감상한다. 기택 가족 수준의 가난은 참고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문광과 그의 남편이 드러내는 세상의 맨얼굴 앞에서 당황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극장 밖으로 나가서 가난의 악취를 직접 맡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수 있을까. 결국 박 사장처럼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 말지 않을까?


보지 않으려는 자, 모두 유죄인가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보는 것이다. 인물들은 박 사장의 저택 곳곳에서 서로를 훔쳐보고 염탐한다. 이는 스토리를 진전시키는 핵심 동력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기택 가족은 부자들의 삶을 엿보려 한다. 전자는 호기심에 가깝고, 후자는 생존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 사장 부부는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 그들은 누군가를 훔쳐보지도 않고, 뭔가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심플하다. 단적인 예로, 자신의 차에서 여자 속옷이 나왔지만 그 내막을 깊게 캐지 않는다. 차에서 마약을 했을 수도 있다는 터무니없는 추측만 가지고 바로 윤 기사를 해고한다. 결정적으로 이들 부부는 기택 가족의 가난에 대해 끝내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보는 것은 선택적 행위다. 박 사장 집에서 급히 도망 나온 뒤, 기정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기택은 "어차피 우리 말고 본 사람도 없으니, 너희는 그냥 못 본 일로 없었던 일로 해라. 아빠가 다 계획이 있다."라고 말한다. 지하실에 갇힌 사람들을 눈 딱 감고 잊어버리자는 선택인 것이다.


이들의 무지는 과연 무죄인가? (사진 출처 : SBS 뉴스)


기택의 선택은 의도적인 외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 사장 부부가 가난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순진함으로 면책될 수 있을까? 연교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며 "비가 와서 미세먼지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몰라. 비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라고 말한다. 폭우로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것은 뉴스만 틀어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이들 부부에게 그것은 TV 속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 잊어도 되는 일, 몰라도 되는 일인 것이다.


박 사장은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사랑하시죠?"라는 기택의 질문과 함께 패닝하는 카메라에 드러나는 그의 불쾌한 표정이 단적인 예다. 세상의 온갖 험한 일들은 욕조에 앉아 TV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눈에 당장 보이지 않고 분리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두가 한 세상에, 한 집안에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정원에서의 난동이 끝난 직후, 박 사장은 차키를 찾으러 문광의 남편에게 다가갔다가 코를 쥐고 고개를 돌린다. 이런 더러운 존재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역겨움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끝끝내 현실의 얼룩과도 같은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구김살 없고 착하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 사장은 죽어가는 문광의 남편에게 "절 아세요?" 하고 묻는다. 매일 밤 자신이 퇴근할 때마다 복도의 센서등을 밝혀주던 남자.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인간 소외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알레고리다.


기택과 충숙의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낑낑대며 테이블을 펴는 충숙의 모습을 보고도 박 사장은 아들이 자고 있으니 조용히 일해달라고 말한다. 인디언 복장을 한 기택에게는 정색한 표정으로 이것도 일의 연장이니 업무라고 생각하라고 이야기한다. 둘 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나 가장으로서의 체면은 집어던지고 노동자로서의 기능에 충실해달라는 요구다. 이러한 요구가 과연 당연한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불량품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진 출처 : 씨네 21)


누가 기택에게 돌을 던지랴


영화 초반에 피자집 사장이 피자 박스 중 1/4이 불량이라며 화를 내는데, 이는 명백히 기택을 가리키는 대사다. 그 상황에서도 충선은 화라도 내보고, 아들과 딸은 사장을 달래 가며 알바 자리를 구해보려 애쓰지만 아버지는 창가에서 멍하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실제로 기택은 시종일관 아무런 계획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기택과 대조되는 인물이 기우다. 무기력한 아버지와 달리 기우는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의욕일까?


이거 진짜 상징적인 거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소비의 자유라는 스펙터클에 사람들을 주목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인간 소외를 정당화하고 비가시화해왔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극 중 초반의 기우는 그러한 스펙터클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체화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소유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바꾸어 보려는 노력.


친구 민혁의 산수경석을 전달받은 이후, 그는 친구의 과외 자리와 여자 친구까지 차지하며 민혁과 동등한 위치에 선 존재가 되고자 한다. (영화 <퍼스널 쇼퍼>의 모린이 종종 떠오르기도 했다.) 사실 박 사장의 집에서 보이는 모습만 봤을 때 기우나 기정은 그 집에 매우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끝내 처참하게 좌절되고 만다.


기우가 상징에 대해 계속 말하는 반면, 기택이 가장 많이 내뱉는 대사는 시기에 대한 것이다.

 

이것 참 시의적절하구나!


대만 카스테라 장사에 대한 언급은 상징적이다. 대만 카스테라 열풍이 불었을 때, 시기를 잘 타고 시장에 진입한 이들은 큰 성공을 거뒀지만, 뒤따라 장사를 시작한 이들은 결국 큰 손해를 봐야 했다.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봐도 시기를 잘못 만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과 계획에 대한 기택의 무용론은 결과적으로 불평등과 가난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임을 역설한다. 기우는 근본적인 계획부터 다시 세워서 시작하겠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기생충>은 물론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런 대안을 알고 있다면 영화감독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생충>이 좋은 영화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눈 돌리지 말고 직시하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눈으로 보는 예술이다. 그리고 보는 것은 명백히 선택의 행위다. 영화감독은 무엇을 카메라에 담을지 선택하고,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볼지 선택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SNS라는 스크린을 통해 보고 싶고 친숙한 이미지만을 골라서 보고 있다.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박 사장 부부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과연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병실에서 깨어난 기우는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는다. 경찰 같지 않은 경찰, 의사 같지 않은 의사, 현실 같지 않은 현실. 그러나 우리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보고 싶은 세상만 선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편하고 꺼림칙한 타자의 얼굴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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