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깨달음에 대한 <로마>의 자기 성찰
* 이 글에는 영화 <로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는 모르는 게 많다. “클레오는 왜 배가 아파요?” 걱정스럽게 물어보지만 어린 페페는 그의 보모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가 누구를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 받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린 알폰소 쿠아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보모 리보를 모델로 <로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억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른이 된 후 리보에게 들었을 그녀의 이야기일 것이다. 과거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뒤늦게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땐 몰랐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의 낙차가 <로마>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영화는 타일 바닥을 내려다보며 시작한다. 물거품이 파도처럼 철썩이며 내려온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정보는 알기 어렵다. 물 위로 떠가는 비행기 그림자와 밀려드는 흙탕물을 보고 물청소 중인 바닥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한참 뒤 카메라가 고개를 든다. 그제야 관객은 긴 복도를 쓸고 있는 클레오를 보게 된다. 마스터 숏으로 전체 상황을 보여주고 클로즈업을 이어가는 고전 문법과 반대되는 방식의 진행이다. <로마>에는 이처럼 정보의 제공이 지연되는 장면이 많다. 예컨대 레몬즙을 짜는 손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땐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다. 뒤따라 붙는 풀 샷을 보고서야 알게 된다. 음식을 먹을 사람의 손과 준비하는 사람의 손이 다르다는 것을.
지연된 깨달음이 이 영화의 테마다. “아, 그랬구나…” 하고 뒤늦게 알아차리는 감각.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기억을 하나의 서사에 녹여내는 대표적인 방법은 플래시백이다. 그러나 <로마>의 주제는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기억을 비교하는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플래시백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찾는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시간이 뒤섞여 흐른다. 페페의 시간과 클레오의 시간. 모르는 게 너무 많던 과거의 시점과 그녀의 삶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현재의 시점이 혼재된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알폰소 쿠아론은 카메라로 둘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다.
두 시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다. 집안의 클레오, 즉 어린 소년이 아는 클레오의 일상을 찍을 때 카메라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관찰자의 시선처럼 좌우로 패닝하며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것은 집안일을 하는 그녀의 손뿐이다. 아이가 알고 있는 클레오에 대한 정보는 이처럼 제한적이다. 반면 집 밖을 나선 클레오를 비추는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거리를 질주하는 클레오를 수평 트래킹으로 쫓아가거나, 적극적인 미디엄 숏이나 클로즈업으로 그녀의 얼굴을 관조한다. 리버스 숏으로 클레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화면이 따라붙기도 한다. 어린아이가 본 클레오의 삶과 그녀가 경험한 세상은 이렇게나 다르다.
<로마>는 화면의 심도를 통해 정보의 격차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 장면의 원경과 근경에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동시에 담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클레오와 페페는 멀리 집 앞에 서있다. 어머니는 떠나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 애쓰는 중이다. 그러나 페페는 차에 가려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아이들이 뛰놀던 장면에서도 거리에 따른 인지의 차이가 발생한다. 클레오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멀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듣지 못한다. 원경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의 시간이, 근경에는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현재의 시간이 흐른다.
정보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로마>는 클레오와 페페 가족의 공간을 분리하여 보여준다. 아이들이 옥상에 올라오자 클레오는 어머니가 알면 혼날 거라고 말한다. 카메라가 원경을 비추자 빨래를 하는 수많은 가정부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옥상은 그들의 노동 공간이다. 부엌을 출입하는 것 역시 보모들 뿐이다. 반면 위층은 가족들의 공간이다. 가족들의 방은 모두 위층에 있다. 클레오는 아이들을 재우고 청소를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내려가야 한다. 그녀는 다시 자신이 속한 노동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차를 가지러 부엌으로 가거나, 빨래를 하러 옥상으로 가거나.
갑자기 방문한 미국인 가족의 집에서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인종 간의 분리로 확장된다. 백인 어른들이 파티를 즐기는 동안 클레오는 아이들을 돌본다. 나이 든 원주민 가정부가 그녀에게 다가와 나가자고 한다. 집 밖을 나가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작은 펍이 나온다. 그곳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원주민들의 파티가 열리고 있다. “저 남자 얼굴 좀 봐. 지난해 토지 분쟁 때 아들을 잃었대.”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는 숲 속에서 백인들이 주고받던 농담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땅따먹기 게임에 빗대며 돈을 버는 사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 페페, 혹은 페페의 가족이 몰랐던 것은 그 고통의 무게다. 전작 <그래비티>에서 우주를 유영하던 카메라와 달리 <로마>는 중력을 의식하게 한다. 로우 앵글의 카메라는 종종 땅에 달라붙어 움직인다. 바닥에 흐르는 물이나 한 마리 작은 도마뱀처럼. 또한 클레오는 하강의 이미지를 계속 목격한다. 영화 속 추락하는 비행기, 인큐베이터 위로 떨어진 벽돌, 바닥에 깨어져 버린 술잔, 흘러내리는 양수. 그녀도 노동과 고통의 무게에서 자유롭고 싶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늘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비행기의 이미지는 그녀의 바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자유, 그러나 그것은 너무 멀게만 보인다.
클레오는 페페 가족에게 자신의 아픔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 같이 일하는 아델라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원주민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양수가 터져 클레오는 병원으로 급히 실려온다. 할머니는 클레오가 걱정되어 울지만 결국 그녀에 대해 아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수술실에 같이 들어가길 거부한다. 결국 클레오는 수술실에서 홀로 아기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바로 이어지는 텅 빈 집의 풍경들. 가족들이 그녀를 위로해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엄마와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새 차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통은 여전히 그녀 홀로 감내해야 할 몫이다.
단 한 번 클레오는 아이들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거친 파도 속에서 파코와 소피를 구해 나온 직후다. 소피아와 페페가 달려와 그들을 끌어안는다. 이때 클레오는 아기가 태어나길 원치 않았다고 말한다. 지연된 그녀의 고백에 관객은 한 번 더 깨닫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도 우리는 클레오의 고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 무게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무거웠음을. 소피아는 우리는 이제 하나이며 어떤 힘겨운 일도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두터웠던 계급 간의 벽이 무너지고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듯한 찰나다.
허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 아버지가 떠난 집은 다소 휑하지만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돌아온 가족들은 위층에 모여 웃고 떠든다. 그리고 클레오는 여느 때처럼 다시 빨래를 챙겨 아래로 내려간다. 습관처럼 켜켜이 쌓여온 벽이 쉽게 허물어질 리 만무하다. 가족처럼 가까운 클레오지만 여전히 그녀는 피고용인으로, 보모로 살아갈 것이다.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단 한 번, 마지막 장면에서 위를 올려다본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우리는 클레오가 매일 빨래를 하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자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우리의 깨달음은 늘 한 발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의 낙차를 곱씹어 보는 것은 중요하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 그랬구나…” <로마>는 무지했던 어린 시절과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망연자실하게 위를 올려다보는 카메라. 그 허탈함을 느껴본 다음에야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