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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팔 Jun 28. 2024

어긋나고 뒤틀린 채 살아가는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리뷰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따뜻한 영화?

<가여운 것들>은 <더 랍스터>, <송곳니>,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등을 연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8번째 장편영화이다. 요르고스 감독의 영화들 중에선 따뜻하고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따뜻함을 떠올리는 것은 곤란하다. 일단 사람이건 동물이건 다 자르고 붙인다. 그럼에도 '따뜻한' 영화란 평을 받는 것은 영화 제목이기도 한 '가여운 것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담긴 시선 때문일 것이다.

 <가여운 것들>에선 그 누구도 악인으로 비치지 않는다.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벨라를 만든 갓윈 백스터도, 백스터에게서 벨라를 빼내 화끈한(?) 모험을 떠나는 호색한 덩컨 웨더번도, 벨라를 매음굴에서 일하게 한 스위니 부인도, 하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고 벨라를 가둬버린 블레싱턴도. 그 누구도 영화 속에선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가여운 것들'이다.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어긋난 것들

극 중 캐릭터, 시대적 배경, 음악까지. 모든 요소들은 조화롭지 못하고 어딘가 어긋난 채로 뒤죽박죽 잘라 붙여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갓윈 백스터 박사가 개의 머리와 닭의 몸통을 잘라 붙인 것처럼.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영화 속 어긋난 존재는 바로 주인공 벨라이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괴짜 외과의사 갓윈 백스터에게 발견된다. 갓윈 백스터는 그녀를 자신의 수술실로 데려가 뇌를 꺼내고, 뱃속 아기의 뇌를 이식한다. 이렇게 몸은 성인이고 뇌는 아기인 벨라가 탄생한다. 벨라는 신체와 정신이 어긋나 있기 때문에 걷는 것도 막 태어난 송아지마냥 어색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그저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맛이 없으면 그대로 뱉어버리기까지 한다. 'Bye'라는 단어도 간신히 구사하는 그녀에게 상류사회의 예의 같은 것은 그야말로 사치에 불과하다. 어긋난 벨라는 그저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울 뿐이다.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또 하나의 재미있는 어긋남으로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런던을 기본 배경으로 하지만 이곳엔 하늘을 달리는 전차나 공중에 떠있는 비행체 같은 미래적 요소들이 군데군데 뒤섞여있다.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오려와 한 곳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 어긋나게 붙인 배경의 부조화는 어안 렌즈로 촬영되어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한다. 영화 <가여운 것들>에선 공간과 인물을 보여줄 때, 어안렌즈를 통해 왜곡된 화면과 아이리스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컷의 구성은 다른 장면들과 어긋나면서 관객들에게 '지금 보고 있는 건 촬영된 화면이야!'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재들이 등장하니만큼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임을 계속해서 인지시키는 듯했다.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관념의 부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정적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벨라는 성인의 몸에 아이의 뇌를 가진 존재이고, 갓윈에 의해 조작된 환경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회적 관념이란 것이 없다. 영화 <가여운 것들>은 벨라를 통해 현실에선 보기 어려운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의 삶을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벨라가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는 이래야 해.'라는 고정관념이 아닌 그녀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과 욕망이다.

 벨라의 생각과 욕망은 영화 초반부 그녀의 뇌가 어린 시절일 때는 본능에 충실하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가득 찬 자유로운 모험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며 점차 성장해 간다. 특히 크루즈에서 마르타 폰 쿠르츠로크와의 만남은 영화 외적으로도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요소이다.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The marriage of maria braun>(1979)의 한나 쉬굴라

마르타 역을 맡은 한나 쉬굴라 배우는 1970년대 독일의 대표적 배우로,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 여러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관능적인 여성의 역할을 맡아왔다. 이런 한나 쉬굴러가 벨라에게 '시간이 지나니 아랫도리를 채우는 것보다 머릿속을 채우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벨라의 성장이 이후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준다. 벨라는 마르타를 롤모델 삼은 듯 그녀와의 만남 이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지식을 탐구한다. 또, 굶어 죽는 인류를 보고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도우려 덩컨 웨더번이 거의 처음으로 카지노에서 딴 돈을 몽땅 챙겨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다. 돈은 선원들이 중간에서 가로채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되지도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녀 자신과 웨더번을 빈털터리로 만들어 크루즈에서 쫓겨나게 한다. 하지만 벨라는 자신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를 곱씹으며 자책도 죄책도 느끼지 않고 그녀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이래야 해.', '저래야 해.' 하는 관념이 형성되지 않은 벨라는 오롯이 자신의 목적과 신념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벨라와 같이 빈털터리가 되어 파리 한복판에 던져진 덩컨 웨더번은 벨라와 정 반대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던 벨라에게 욕설을 하고 거지가 된 자신의 신세에 고함을 지르며 절망한다. 같은 상황 속 상반된 인물들의 태도는 과연 삶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벨라처럼 해맑게 매음굴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벨라의 선택은 그녀가 런던으로 돌아와 맥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 찾아온 전남편(?) 블레싱턴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는 유럽 대륙을 탐험하고, 책을 통해 철학과 지식을 배운 벨라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갓윈이 뇌를 아예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벨라에게 '빅토리아'의 기억은 당연히 없고, 이 사라진 기억이 갑작스럽게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벨라가 자신의 예전 모습인 '빅토리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법은 블레싱턴을 따라 그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블레싱턴의 집에 도착한 벨라는 하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어보지만, 하인들의 반응과 블레싱턴의 행동을 보아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벨라는 결국 블레싱턴의 발을 총으로 쏘고 갓윈의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부조화의 조화

영화는 성인의 신체와 아기의 뇌를 가진 벨라, 벨라 ver.2 같은 펄리시티, 아마도 양의 뇌를 가지게 된 블레싱턴, 개의 머리와 닭의 몸통을 가진 댕댕닭이 꽤나 평범하게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어긋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들끼리 모여 꽤나 조화롭게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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