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이수자인 지인의 소개로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금당 마을에 작업실을 만든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나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고단한 도시생활의 피로가 회복되는 과정이겠거니 위안을 삼는 게 전부였다.
기나긴 작업을 위한 각종 재료들이 준비되자 잠시 환기가 필요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말투며 움직임, 심지어 냄새까지 그리운 데다 한 달 반을 멀리한 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평소 오랜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니는 취향이라 한잔을 마시더라도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선호했는데 십 여 분간의 검색 후, 기묘하게 생긴 양조장 사진과 함께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 목표지점이 포착됐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미세먼지까지 없는 맑은 날씨라 서둘러 트레킹화의 끈부터 묶었다.
3km 정도 걸어서 운주면에 위치한 소박한 터미널에 도착했다. 기점인 전주역까지 가는 300번 버스가 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엔 시간당 한번 꼴로 운행 중이고 해가 지면 막차 한 대가 고작이지만 지역민의 발이 되어 주는 친근한 안내자일 것이다.
자연을 닮은 풀색 버스는 푸릇푸릇해진 창밖의 봄 풍경과 하나가 되어 달린다. 대둔산 자락의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국도로 30분을 달려 금세 충청남도 논산시 동남부의 면인 양촌면에 도착했다. 대둔산 도립공원과 건양 중. 고등학교도 있고 교복 입은 학생들뿐 아니라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로 보였다. ‘양촌(陽村)’이라는 지명처럼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봄바람과 함께 온 몸을 휘감는다.
논산 천을 건너 옛 장터 길로 걸어가면 ‘양촌 양조장’이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입구부터 누룩 냄새가 훅 들어온다. 벌써 취기가 오르는 거 같다. 멀리 안채에서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나오셨다. "사장님 막걸리 다섯 병만 주십시오." 그랬더니 냉장고를 가리키며 골라 보라고 했다. 꽤 종류가 다양했다. 프리미엄급인 청주부터 생막걸리까지 다섯 종류인데 딱 한 병씩만 샀다. 외관상 양조장 내부가 구석구석 궁금했지만 오늘은 일단 막걸리만 사고 인근 송어회 식당을 가보려고 했다. 막걸리 맛만 좋다면 다시 찾아 올 계획이었다. 외지 사람이 분명해 보였는지 사장님은 명함을 건네며 어디서 왔고 뭐하시는 분이냐고 점잖게 물으셨다. 사장님의 인자한 미소에 나는 서울에서 완주 쪽에 잠시 내려와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사장님은 급 화색이 돌더니, 원래 단체만 되고 예약이 필수인데 특별히 견학을 시켜주시겠다고 했다.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거절하기가 대략 난감했다.
예상치 못한 사장님의 1:1 특강이 시작되었다. 졸지에 양조장의 역사와 내부를 탐방하게 되었다. 처음은 쭈뼛쭈뼛했지만 차츰 메모와 사진을 찍으며 흥미가 생겼다. 사장님은 꼭 SNS에 올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아니 자못 비장했다. 너무 진지한 그분의 표정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1920년대 가내 주조로 시작한 지금의 양촌 양조장은 1931년 지어진 한옥식 목조 건물이라고 했다. 보통 술을 만드는 특성으로 인해 반 지하에 발효실을 설치하고 2층엔 술밥을 쪄서 식히는 곳을 만든다고 하셨다. 계절에 따른 온도 변화를 차단하기 위해 반 지하에 발효실을 만들었단다. 2층 천정 대들보에 적힌 글을 보니 한자로 소화 6년(1931년) 6월 9일에 지어졌다고 쓰여 있다. 특이하게도 내부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깊게 파놓아서 물을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다며 은근 자랑이시다. 농약을 쓰지 않는 논산에서 자란 우렁이 쌀이 술의 주된 원료라고 한다. 2층에서 찐 술밥을 반지하인 발효실로 내려 보내는 곳은 관람객을 위해 유리로 볼 수 있게 해 놓았으니 이마저도 사장님의 여유와 자부심이 전해졌다.
봄바람이 살랑대는 뒤뜰로 나가 보니 안채 마당에는 엎어진 항아리가 한가득 떼를 지어 숨 쉬고 있고 삶의 흔적이 느껴지는 각종 도구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무겁기도 하고 항아리 소독이 힘들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존이 잘된 집안 유물들을 통해서도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장인의 고집이 느껴졌다.
알찬 특강이 끝나자 부속시설인 막걸리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결국 사장님이 손수 만든 우렁이 무침과 파전에 시음까지 하게 되었다. 한 잔 술이 건네지고 어느덧 서로의 술잔이 늘어난다. 이젠 시음이 아니라 음주의 서막이 열렸다. 서서히 해는 저물어 갔다.
삼대째 가업을 잇는 자신은 자식 복도 많고 다음 대를 누가 이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고 한다. 추후 양조장 경영을 가장 원하는 자식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실상은 내부 경쟁이 치열하다며 은근 또 자식 자랑에 여유가 넘친다. 내 잔을 채워주는 그분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차분한 주름과 훈훈한 미소와 입담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탄산이 적고 부드러운 두유를 마시는 듯 천천히 취기가 오르는 우렁이 쌀 막걸리 브랜드가 다섯 종류 중 내 입맛에 제일 잘 맞는다. 물론 양촌 양조장에서 만든 다섯 종류 모두 이제껏 마셨던 막걸리와는 근본적으로 품질이 다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를 섭렵한 건 아니지만 5할 이상은 맛보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안주를 잘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가진 나는 우렁이 초무침에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초무침을 보고 ‘골뱅이도 아니고 뭐냐?’ 속으로 무시했다. 사장님의 잦은 권유로 마지못해 한 입을 밀어 넣는 순간, 지나 간 술잔과 파전에 눈길을 뺏긴 걸 후회했다. 젓가락질이 계속되고 폭풍 흡입했다. 을지로 골뱅이 골목의 모든 골뱅이 집을 잊게 해주는 맛이다. 아니 MSG로 버무린 골뱅이 무침과는 비교해선 안 되겠다. 투박하게 썰어놓은 갖은 야채와 논산 천에서 잡은 자연산 다슬기로 초무침을 한 우렁이 초무침은 별미였다.
공간 그 자체에도 감정이 살아 있다. 간혹 우렁이 쌈밥 집 메뉴에도 있지만 양조장에서 먹는 논우렁이 쌀로 빚은 양촌 막걸리와 우렁이 초무침의 궁합은 가히 미각을 넘어 영혼까지 흔들어 놓는다. 우렁이를 씹는 식감에 알싸하게 퍼지는 풍미가 머리까지 맑게 해 준다. 나에겐 오래간만에 느끼는 자연의 맛이다. 도시 생활에 지친 친구들을 억지로 데리고 와서라도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볕을 닮은 양조장 장인의 따스한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일 여유까지 곁들이면 상처 난 마음도 곧 아물게 되겠지.
배웅하는 사장님의 얼굴을 뒤로하고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300번 버스 막차에 올랐다. 이리저리 출렁거리는 다섯 통의 막걸리를 끌어안았다. 어느덧, 내 마음은 넉넉해져 꿈속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