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1980)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80년작 <샤이닝>은 음향이나 연출 등의 형식이 주는 공포만큼이나 내용이 주는 공포 역시 섬뜩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어느 포인트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장르적인 재미가 뛰어난 호러물이 될 수도, 현실세계에 맞닿은 무서움을 환기시키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영화가 가부장제라는 현실에 대한 섬뜩한 보고서로 다가왔다.
비성수기인 겨울 시즌에는 문을 닫는 '오버룩' 호텔. 잭(잭 니콜슨 분)과 그의 가족은 그 기간동안 호텔을 관리하기 위해 홀로 호텔에 거주해야 한다. 외부로터의 고립이 가져온 평온은 곧 불안으로 변한다. 여기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기 위해서는 겨울동안 책의 집필을 완료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해져 잭은 점점 미쳐간다. 그리고 그 광기는 자신의 책임감의 근원이 된 가족들을 향하기 시작한다.
가족에 대한 잭의 인식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자신만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책임은 실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책임감에 따르는 혜택을 누리려 기꺼이 쓴 무거운 왕관에 불과한 것인가? 적어도 잭의 경우에는 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이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잭의 인식은 음주와 육체적인 외도 등의 일탈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그것은 광기를 폭력으로 분출하기에 앞서 자신은 화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선도'하는 것 뿐이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내 분업은 하나의 생존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잭이 간과하는 것은 누구도 그에게 책 집필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이미 호텔 관리에서 오는 충분한 수입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집필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호텔의 관리와 자녀의 양육을 도외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집필 도중 자신에게 말을 건 아내에게 자신을 방해했다며 신경질을 내는 이유가 될 수도 없다. 가사와 양육은 아내에게 일임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을 추구하는 것은 '생계'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책임감이라 할 수 있을까.
잭의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는 그의 아들인 대니(대니 로이드 분)의 반응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대니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빠인 잭의 폭력을 계기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대니가 호텔에서 계속해서 느끼는 미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불안감은 아빠인 잭의 잠재적인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니에게 광활한 놀이터였어야 할 그 호텔이 무수한 불안요소들이 점철된 공간으로 변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잭의 그 알량한 의무감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비단 잭만의, 영화만의 이야기일까. 당연히, 모든 남성 가장이 일탈과 폭력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기초하여 무수한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잭 역시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의 피해자인가? <샤이닝>에서 세 가족의 비극은 똑같은 무게로 다뤄질 수 없다. 잭을 파멸시킨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웬디와 대니를 파멸시킨 것은 잭이라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영화가 지극히 비현실적인 공포를 선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공감할 수밖에 현실적인 두려움이 이 영화의 공포를 극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