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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브러리 Jan 19. 2016

<잉여들의 히치하이킹>(2013)

이제는 가슴 속 계산기를 부셔버려야 할 때



머슬링 스루(muddling-thorugh)라는 단어가 있다. '그럭저럭 헤쳐가기'라는 의미를 가진다. 획일성을 띠게 된 현대사회에서 이 단어가 설 자리는 그닥 많아보이지 않는다. 우리 청춘들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해놓은 인생 절차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마치 어항 속 금붕어들처럼, 한정된 공간 안에서 누군가가 건네주는 모이를 먹기 위해 입만 뻐끔거리기 바쁘다. 어항 밖의 세상은 단순히 불투명한 미래에 불과하며 그것을 추구하기보다 테두리 안에서 제공되는 양식을 받아먹으며 사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안정된 삶이라며 자위한다. 확률의 법칙만을 맹신하는 이 가여운 청춘들에게, '머슬링 스루'라는 단어는 원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작품을 연출한 이호재 감독이 히치하이킹을 하는 모습.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춘들이 안정을 위해 이성을 택했다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속 '서플러스' 4인방은 과감하게 본능을 따라간다. 대학교->학점->자격증->어학성적->취업으로 요약되는 잔인한 커리큘럼에서 벗어난 그들은, 이같이 잘 짜여진 체계를 완벽하게 거부한다. 천편일률적인 자국의 교육과정에 염증을 느낀 그들은 중퇴를 결심하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들이 가진 거라곤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최소한의 생계비 80만원이 전부였다.


영상 콘텐츠를 전공했던 이들은 제각각의 특기를 골고루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이 그려놓은 청사진의 개요는 대략 이렇다. 유럽 각지에서 운영되고 있는 호스텔들과 연락하여,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호스텔 홍보 영상을 제작해주는 거래를 튼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숙식을 해결하면 무일푼으로도 여행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심지어 부차적인 수입까지 따라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상상도 품어본다. 그렇게 1년 남짓한 기간을 유럽에서 머물고, 여행 막바지에 영국 아티스트들과 접선하여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본인들이 직접 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잉여 4인방'의 최종 목표이다. 


호스텔 홍보 영상을 촬영하는 장면. 선글라스를 낀 인물은 일약 인터넷 스타덤에 오르게 된 하비(22). 


도입부에서 그들이 들려주는 원대한 포부는,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나 역시도 현 사회가 강요해온 안정주의에 물들어버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야심찬 계획은 불가능해 보였다. 단순히 뜨거운 청춘들의 치기 어린 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무모하고 무쓸모한 행동이라 취급했다. 근데, 이 부정적인 단상들은, 결국 산산조각 났다.




비록 이 거창한 결심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 젊은이의 치기 혹은 객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네 청춘들은 적어도 뒷편에 숨어 생존 확률만 계산해대는 어리석은 현실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패기를 무기 삼아 계산없이 부딪히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확률을 도출해내는 행동가들이었다. 이들에게 계산은 그저 시간낭비와 감정 낭비에 불과하다. 서플러스 4인방은 '그럭저럭 헤쳐가기'를 몸소 실현하며 세상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함을 경험으로 체득해버린다. 아니, 가능성을 생성해나간다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탁월한 기술적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제작한 호스텔 홍보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저 불타는 열정만을 무기로 모험을 이어나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상당히 고퀄리티의 영상들이다. 그제야 왜 이 친구들이 그토록 무모한 도전을 기획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양질의 홍보물들은 인터넷망을 통해 유럽 각지로 퍼지게 되고, 이는 그들의 최종 목표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영국 밴드 Arco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잉여 4인방은 결국 최종 목적지까지 도달한다. 홍보영상 콘텐츠를 접한 기획자들은 그들의 제안에 응해왔고, 그 중 브라이언이라는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맡게 된다. 심지어 김호재 감독의 오랜 페이버릿 아티스트인 밴드 Arco마저 잉여들의 발칙한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이 존재할 것만 같다. 수년간을 홀로 애정해오던 가수와 무일푼 청년의 협업이라니.


판타지와도 같은 이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가능케 한 요인은, 바로 행동력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현지인들의 냉정한 히치하이킹 거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스텔의 거절 답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명한 아티스트의 무관심을 미리 예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산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의 채로 행동들을 거르지 않았고, 본능적인 직감에 모든 걸 맡겨 버렸다. 그것이 바로 이 기상천외한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막을 내리게 해 준 원천이었다.




비록 흔들리는 캠코더 영상으로 다소 어지럼증을 느끼긴 했지만, 너무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는 도전 본능을 다시금 꿈틀거리게 해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이상을 좇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또한 우리의 본능 역시도 그것을 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서플러스 4인방의 여정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오르게 했다. 소설 속 조르바의 대사로 이 흐뭇한 감상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에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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