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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브러리 Jan 25. 2016

<박쥐>(2009)

죄의식을 마주하는 두 개의 시선



환자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병원에서 근무하던 신부 상현(송강호 분)은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백신 실험에 참여한다. 바이러스균에 감염되어 죽음을 맞이하지만, 정체모를 누군가의 피를 수혈받아 회생한다.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온 피는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놓는다. 이제 그는 주기적인 혈액 섭취를 하지 않을 시, 체내의 바이러스가 재발하여 죽게 될 운명에 놓인다. 


이런 그의 앞에 태주(김옥빈 분)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상현의 어릴 적 친구였던 강우(신하균 분)의 아내이자, 기묘한 아우라를 풍겨대는 라 여사(김해숙 분)의 양딸이기도 하다. 기괴한 집안에서 감당해야 할 운명에 염증을 느끼던 태주는 상현에게 자연스런 호감을 갖게 되고,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니들은 남의 집이 아작이 났는데 마작이 하고 싶냐."


영화 <박쥐>는 제 6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박찬욱 감독 개인에게는 <올드보이>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이어 3번째 수상을 안겨주게 된다. 각국의 영화제가 내렸던 호평과는 달리, <박쥐>를 향한 국내의 의견은 실로 분분하다. 호불호가 상당히 명확한 작품이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 동안 피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혈이 낭자하는 미쟝센과 이를 위해 설정되어야 하는 폭력성은 아마도 다수 관객들의 시선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허나, 오히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연출과 그로테스크한 미쟝센이 뿜어내는 매력에 도취된 관객의 수도 결코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 난 후자의 입장이다.


<박쥐>는 매번 '봐야 할 영화' 리스트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쉽사리 시도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박찬욱을 찬양경배하는 열렬한 추종자이다. 근데 <박쥐>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전작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혹, 박찬욱에 대한 실망감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괜한 우려가 여지껏 관람을 지연시켰던 셈이다. 하지만 아주 다행히도, <박쥐>는 나의 헛된 걱정거리를 초전박살 내버렸다.




작품은 상현과 태주의 불가사의한 관계를 통해 전개된다. 이 관계는 그들의 '탈선'을 계기로 시작된다. 비록 뱀파이어 일지라도, 상현에게 '욕정'이란 신부로써 지녀서는 안 될 일종의 터부(taboo)와도 같다. 성욕을 잠재우기 위해 리코더로 자학하는 상현의 모습은 종교적 불문율과 인간의 원초적 본능 간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혼란을 감내해야만 하는 신부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주는 한 가정의 일원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비록 무능력하고 모자란 남편이지만, 간통은 엄연히 불법적인 행동이다. 결국 두 사람은 탈선을 저지르고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태주의 잠재된 폭력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장면.


두 인물 중 속편한 쪽은, 단연 태주일 것이다. 태주라는 캐릭터 자체가 억압과 천대받는 과거를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탈선행위에는 죄책감이 아닌 보상심리가 작용하게 된다. 육지에 떨어져 아가미를 펄떡펄떡 벌려재끼던 물고기가 다시 물을 만나 헤엄쳐 대듯이, 뱀파이어로 거듭난 태주는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반면 상현은 그녀와 달리, 끝없이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린다. 태주를 향한 욕정, 그리고 신부이자 인간으로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 이 상극에 놓인 두 감정은 끊임없이 상충하고 부딪히며 상현을 더욱 괴롭게 만든다. 결국 그는 뱀파이어로써의 자살을 택하며,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흡혈귀라는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로 진행되지만, 그 속에는 분명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단순히 피 빨아먹고 살인하고 끝나버리는 시시껄렁한 스토리가 아니란 거다. 상현의 고뇌에 공감하고 그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역시도 뱀파이어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기상천외한 영화적 발상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신선하다. 평이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곳곳에 회심의 한방을 준비해두는 연출, 실험정신이 그득한 그로테스크한 미쟝센, 부조화스러운 사운드, 비정형적인 촬영기법까지. 아마도 <박쥐>는 박찬욱의 강점을 한데 모아둔 종합세트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태양빛에 소멸되기 직전, 상현의 큰 구두와 태주의 가녀린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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