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못하던 것을 선택하려는 자

<룸 넥스트 도어>(2024)

by 말 넘기


한참 유행하던 MBTI 검사를 보면 어떤 상황을 주고,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를 물어보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MBTI나 성격 검사들은 상황에 따른 사람의 선택들을 보고 그 사람의 유형이나 성격을 분류하게 되는 것이다. “너 T야?”라는 말이 밈이 되는 시대에 살다 보면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에 일견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그런 삶을 유독 전쟁처럼 겪어낸 사람이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덤덤히 그리고 있다.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건조하고 정돈된 이미지이다. 너무 춥지 않은 겨울의 어느 새벽을 닮은 공기가 영화 전반에 잔잔하게 깔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결코 조용하지는 않다. 바짝 마른 피부 아래 숨겨진 핏줄 속에는 더이상 치료할 수 없는 암환자의 고통에서부터 뻗어나가는 다양한 역동들이 존재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의 PTSD,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딸의 결핍, 편모로 아이를 키워야 하던 엄마의 일에 대한 집념, 종군기자로서의 정체성, 반복되는 전쟁 안에서 도피와 같은 섹스와 약의 편린은 천천히 흘러가는 주마등처럼 고동치며 삶의 궤적을 그려낸다. 마사의 죽음의 의지와 계획은 깨끗하고 건조하게 영화를 장악하지만 마사의 삶은 내내 그 아래에서 거칠게 요동치고 있다.


오히려 삶이 그녀를 끊임없이 담금질 해왔기 때문에 마사는 도리어 미련없이 그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왔다. 어떤 일은 해냈고, 어떤 일은 해내지 못했다. 기자로서의 그녀의 업적은 놀랍지만, 가족으로서의 그녀는 낙제를 면하기 힘들어보인다. 친구로서 그녀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연인으로서 그녀는 충실한 연인은 되지 못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각각의 역할에 노력을 해왔지만 어떤 역할은 잘 맞았던 반면 어떤 역할은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다. 삶에 있어 모든 역할을 완벽히 해낼 수 없다는 것마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역시 선택을 해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삶에 선택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탄생은 선택하지 못했을지언정 죽음은 선택하려 하기에 이른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회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일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가 계획한 죽음이라면, 그렇게 고통이 없고 깨끗한 마무리라면 스스로의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사치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선택할 때, 죽음의 시간과 수단 뿐만 아니라 죽음의 장소와 죽음의 동반자도 함께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위해 마지막의 삶의 순간들 마주해 나간다.


그 과정을 함께 하는 친구는 한동안 연락이 드물었던 친구이자, 죽음이 두려운 베스트셀러 작가다. 죽음을 결심한 단호한 성격의 친구와 그 모든 과정이 불안하고 무섭지만 결국 함께 해주기로 결정한 친구의 연대는 ‘옆 방에 머무르는 존재’로 정의되며 임종과 가족의 정의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혈연과 계약으로 맺어지는 가족공동체는 마사의 삶에 있어서 성공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떠돌아다니는 종군기자의 생활을 오래 한 그녀에게 집을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 역시 효과적인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차라리 오래 소식이 없더라도 다시 연락했을 때 반가운 친구가 그녀에게는 삶의 마지막을 건네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생의 모든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라면 마사는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이 아닌 다른 이를 가족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마사의 죽음의 선택에는 감히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을 제하고서도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선택들이 많이 전제되어있다. 운명이 정해준 시간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시간에, 집이 아닌 곳에서 사망하면 객사라고 정의하기도 하는 관습 안에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마무리할 것을 선택했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동반자와 함께 하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다. 부조리하거나 억지로 이어붙이지 않고, 이유를 다그치는 사회 체계에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시치미를 뗀다. 얼마나 천연덕스럽고 매끄러운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일을 재현한다고 했을 때, 굳이 어려운 점을 찾자면 그렇게 깔끔한 자살 약물을 다크웹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해결해버린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결국 옆 방에 나의 마지막을 함께 해 줄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존의 관념을 위반해야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기준 앞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은 마치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눈처럼 사소한 규칙들과 사소한 관습들을 덮어버린다. 불가역한 선택은 거대한 기준이 되어 다른 규범들의 절대적 한계가 되어 군림한다. 죽음은 모든 생의 종말이 되고, 모든 생은 홀로 종말을 향해 걸어가지만 결국 모두 같은 곳에서 만날 것이다. 마치 옆 방에 머물러 준 존재는 잉그리드이기도 하지만 마사이기도 했던 것 처럼, 각각 다른 방을 사용하지만 느슨하게 연대하고 있다. 마사를 위해 잉그리드는 한 집에 머물러 주었다. 그리고 마사의 딸을 위해 잉그리드는 자신의 집의 방 한켠을 기꺼이 내어주는 관계를 맺을 것이다. 마사와 마사의 딸은 옆 방에 나란히 있을 수 없었지만 잉그리드를 매개로 둘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의 선택에 엇갈렸던 감정은 죽음이라는 종결 앞에서 풍화되고 눈 아래 파묻힐 것이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