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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19. 2018

픽사의 가장 간절한 위령제, '코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이자 리 언크리치와 아드리안 몰리나가 공동으로 연출한 ’코코’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을 노래할 줄 아는 애니메이션이다. 멕시코의 토착 문화인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을 소재로 하는 이 영화는, 밝은 분위기와 화려한 색채로 꾸며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정서와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코코’에서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물질인 ‘사진’과 관념인 ‘기억’ 사이의 활용이 탁월하고, 배경이 되는 두 세상 사이를 오가기 위해서 필요한 ‘신발’과 ‘꽃잎’ 사이의 관계가 인상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을 서로 매개하려는 듯한 이 영화는 마치 픽사 스튜디오가 지내는 간절한 위령제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위령제에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그건 신발로 꽃잎을 딛는 행위와 사진에 기억을 싣는 행위일 것이다. 오랜 부진을 딛고, 애니메이션 명가 픽사 스튜디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또 한 편 세상에 내놓았다.



‘코코’는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는 길거리를 수놓은 색색의 깃발을 비추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빌어 한 가문의 역사를 되짚으며 시작된다. 주인공 미겔(앤서니 곤잘레스)의 목소리로 회술되는 그 역사 속에서는 리베라 가문이 어떻게 음악을 등지고 신발을 만들게 되었는지가 드러나는데, 결국 그 안에서 ‘음악’으로 대표되는 이상과 ‘신발’로 대표되는 현실은 마치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제시된다. (몇 대에 걸쳐서 신발을 만들어오고 있는 리베라 가문은, 말하자면 현실주의자들인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마 코코(아나 오펠리아 무르기아)가 있다. 리베라 가문의 제단이 놓인 방 안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며 음악과 신발, 그 양 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묘사되는 그녀는, 마치 중간자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건 미겔도 마찬가지였다. 리베라 가문의 일원으로서 신발닦이 일을 하고 있지만 몰래 음악의 꿈을 꾸는 이 소년은, 가족들이 신발 제작을 배울 것을 권유한 순간 자신의 이상을 포기한 채 현실에 순응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축제에서 노래하기 위해 전설적인 뮤지션 에르네스토 델라크루즈(벤자민 브랫)의 기타를 훔친다. 그리고 죽은 자의 날에 죽은 자의 물건에 손을 댄 미겔은, 결국 저주받은 채 하룻밤 동안 죽은 자의 세상을 떠돌게 된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엑토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있다. 한 해에 오직 하루, ‘죽은 자의 날’에만 산 자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는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누군가가 제단에 그들의 사진을 올려놓아야만 무사히 심사를 통과해 산 자의 세상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엑토르의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번번히 심사를 통과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우연히 엑토르는 미겔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조상인 에르네스토 델라크루즈에게 축복을 받아 산 자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겔의 목표와 자신의 사진을 산 자의 세상 어딘가에 올려놓을 이를 찾고자 하는 엑토르의 목표가 한데 수렴하자, 둘은 함께 행동하게 된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해골의 형체로 남아 살아가는 죽은 자의 세상은 일견 시끌벅적하고 화려하게 묘사되지만, 사실 그 너머에 놓여있는 것은 (그 자체로 역설적인) 죽은 뒤의 황량한 삶과 쓸쓸하기 그지없는 ‘마지막 죽음’이다. 이 영화 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 해골의 형체마저 잃어버리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은, 떠나오기 전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을 때이다. 그들은 이를 가리켜 ‘마지막 죽음’이라 칭한다. 즉, ‘코코’에서 (물리적인)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는 단계일 뿐이고, 완전한 의미의 (정신적인) 죽음은 삶이 끝났을 때가 아니라, 모두에게 잊혀졌을 때 찾아온다. 그렇다면, ‘코코’에서 말하는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기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엑토르는 기억이란, 무릇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을 이야기나눌 때 살아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코코’에서 기억은 회자될 때 비로소 기억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이 영화는 기억되기 위한, 나아가 회자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다름아닌 사진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에서 기억과 사진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단에 사진을 올리고 죽은 자의 날에 사자(死者)들을 추억한다는 것은, 곧 죽은 자의 기억이 산 자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제단에 올라가지 못한 사진, 즉 산 자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진이 두 장 있었다. 하나는 (리베라 가문의 제단에 얼굴 부분이 찢겨진 채 올려져 있는) 델라크루즈(로 여겨지는 자)의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본인이 지니고 있는) 엑토르의 사진이었다.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사실 이 두 가지 사진이 모두 엑토르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겔은 돌아가기 위해 더 이상 델라크루즈에게 축복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죽은 자의 세상에서 산 자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며, 이때 이 두 세상을 매개하는 물질은 금잔화 꽃잎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에는 금잔화 꽃잎이 잔뜩 깔린 채 흘러내리고 있다.) 금잔화 꽃잎에 축복의 말을 담으면, 축복을 받은 이는 비로소 산 자의 세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프리다 칼로로 변장했지만 결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엑토르가 억지로라도 금잔화 꽃잎이 깔린 다리를 건너가려 하지만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엑토르가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에서, 다리를 무사히 건너가는 다른 죽은 자들은 모두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자들이 제단에 사진을 올려서 죽은 자의 기억을 공유하는 행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신발을 신은 채로 금잔화 꽃잎이 깔린 다리 위를 건너가는 행위 역시 필요한 것이다. 신발로 꽃잎을 딛는다는 것, 그리고 사진에 기억을 싣는다는 것. 이 두 가지 행위가 선행되어야 죽은 자는 산 자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코코’의 핵심이 놓여있다.



이를 바탕으로 떠올려보면, 리베라 가문의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하필 신발을 만드는 수공업이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일 것이다. 엑토르가 떠나버린 뒤 마마 이멜다(알란나 유바크)가 신발을 만드는 가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엑토르가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려는 상징적인 바람이 담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극 후반부에 재회하게 되는 마마 이멜다와 엑토르의 미묘한 관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게 된다. (마마 이멜다는 음악을 적대시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게 미겔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자신과 어린 코코를 떠나버린 엑토르에게 시종 툴툴거리지만 그를 두고 ‘내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영화 속에서 음악은 이상을 대변하고 신발은 현실을 대변한다. 이상, 출가, 그리고 음악을 선택한 엑토르는 현실, 가족, 그리고 신발을 잃었다. 그러나 마마 이멜다가 엑토르와 미겔을 델라크루즈의 함정으로부터 구출하는 순간, 흩어졌던 가족은 엉성하게나마 다시 한 곳에 모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코코와 엑토르를 다시 만나게 할 차례다. 엑토르를 잊어가는 마마 코코는 그를 떠올려야 하고, 신발을 잃어버린 엑토르는 무사히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그러니까 ‘코코’는 마마 코코에게 기억을 돌려주려는 이야기인 동시에, 엑토르에게 신발을 신겨주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사진을 갖고, 꽃잎을 통해) 두 세상을 오갈 수 있는, 이 영화에서 마치 전령사와도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미겔 뿐이다. (그래서, 미겔의 역할이 자명해진 바로 그 순간 미겔의 단짝이었던 단테는 전설 속의 알레브리헤로 변한다.) 신발로 꽃잎을 딛고, 사진에 기억을 실어야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는 다시 해후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이 간절한 위령제는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음악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애초에 미겔이 죽은 자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음악에 빠져 죽은 자의 기타를 훔쳤기 때문이었다. 미겔이 델라크루즈와 엑토르를 서로 만나게 하고 비로소 자신의 가족사에 얽힌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파티장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델라크루즈가 빼앗아 간 엑토르의 사진을 무사히 되찾아오기 위해서, 마마 이멜다는 무대에서 임기응변으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음악이 없었다면 이 위령제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행위 자체가 영화의 목표와 연쇄적으로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이는 ‘코코’에서 음악을 이상으로 치환하는 방식과 묘하게 닮아있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제목이 (소위 음악가라 할 수 있을 ‘미겔’ 혹은 ‘엑토르’가 아닌) ‘코코’인 이유는, 영화의 후반부에 두 번 반복되는 ‘기억해 줘(Recuérdame)’라는 노래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회상 속에서 엑토르와 어린 코코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산 자의 세상으로 돌아온 미겔이 마마 코코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는 공통적으로 ‘코코’가 등장한다. (상술했듯 이 영화에서 마마 코코는 마치 중간자적 존재처럼 묘사되지만, 이 두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코코의 노래를 통해 이 두 시간대가 연결되는 순간, 비로소 몇 세대에 걸친 기나긴 시간을 지나 ‘코코’는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부재의 기억을 우물처럼 끌어올린다. 마마 코코가 서랍 속에 간직해두었던 엑토르의 사진을 꺼내자, 엑토르는 더 이상 ‘마지막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제 그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 의해 회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리베라 가문의 제단에 엑토르의 사진이 올라가고 신발을 신은 엑토르가 금잔화 꽃잎이 흘러내리는 다리를 건너자, 리베라 가문은 ‘죽은 자의 날’을 다시금 맞이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이 이어지고, 리베라 가문의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뒤 떠들썩한 축제를 벌이며 ‘코코’는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향한 카메라는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것과 같은 깃발을 다시 한 번 비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 깃발들을 통해 ‘코코’는 리베라 가문의 역사를 읊조렸고, 그 역사 속에는 이상과 현실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제처럼 깔려있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깃발 속에 깃든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속에는 음악이 더해졌을 것이다. 음악은 현실과 이상이 더 이상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주었고, 부재의 기억을 되살려 잊혀져서는 안 될 이에 대한 기억을 회자될 수 있게 했으며, 그렇게 엑토르와 코코를 다시금 이어주었다. 그래서 ‘코코’는 음악으로 막을 내린다. 그 막 뒤에는 이제 죽은 자의 세상에서 더 이상 잊혀지지 않을 엑토르가 있고, 절절하게 그리던 기억을 떠올린 뒤 죽은 자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마마 코코가 있으며, 두 세상을 매개하며 산 자의 세상에서 매년 죽은 자의 날이 오면 그들을 기다릴 전령사 미겔이 있다. ‘코코’의 간절한 위령제는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을 담은 그들의 노래는 영원히 이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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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Coco, 2017)

dir. 리 언크리치, 아드리안 몰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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