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괴하고 아름답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극히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들었을 법한 멜로영화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데뷔작 ‘크로노스’에서부터 천착하고 있는 소위 크리처물이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발현되어 왔다. 일례로 2006년작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스페인 내전의 참담한 역사를 동화의 형식을 빌어 델 토로식으로 풀어낸 작품이었다면, 그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미소 냉전기의 공허한 역사는 멜로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된다. 이때 그의 작품들이 훌륭한 것은, 영화라는 형식적 틀을 빌어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현실에 가닿지 못하던 환상을 현현(顯現)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줄곧 자신의 장르적 애정을 듬뿍 담은 작품들을 만들어오면서도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완성도의 측면에서 다소 들쑥날쑥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딕 풍의 호러를 지지부진하게 풀어냈던 범작 ‘크림슨 피크’ 이후 2년,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자기 자신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로 세운 적 있었던 높은 정점에 ‘셰이프 오브 워터’로 다시 한 번 도달한다.
물.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이라는 영화의 원제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물론 물의 물성(物性)에 관한 이야기다. 물 속에 잠긴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집을 유영하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물 속에 잠겨 바다 속으로 침잠하는 엘라이자와 (크레딧에서는 양서류 인간(amphibian man)으로 지칭되는) 괴생명체(더그 존스)를 바라보며 끝맺는다. 물에서 시작되어 물에서 끝나는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비교해 볼 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집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돌려 말하자면, ‘셰이프 오브 워터’는 ‘집(이라는 정형화된 인위적 공간)’을 버리고 ‘물(이라는 비정형화된 근원적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영화다. (마치 동화와 같은 이 영화의 오프닝이 말해주는 것은 집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 차올라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물이 있어야 할 곳에 집이 가라앉아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엘라이자의 집은 바다 밑바닥에 위치해 있었다.) 아기 때 버려진 엘라이자는 물 속에서 발견되었고, 괴생명체는 태생적으로 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괴생명체는 모습 그 자체로 어인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가 시작할 때 엘라이자를 가리키는 ‘목소리를 잃은 공주’라는 나레이션은 인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서 물은 탄생의 근원을 은유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영화 속에서 수도 없이 환기되는 근원으로서의 물이 이야기 속의 다른 요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이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볼티모어 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시공간은 미소 간의 냉전이 극대화되던 시기인 동시에 백인 남성 위주의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적 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결국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려는 문화가 만연했던 1960년대 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나를 앞서가는 것을 오만한 것으로 규정하고 격하하려는 문화가 팽배했던 미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그릇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는 물의 모양처럼,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는 닮아있음을 역설하려는 영화니까 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물의 모양’이라는 기묘한) 제목에서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물처럼 정형화될 수 없는 것들의 본질에 대해서이고, 그것은 곧 사랑으로 표현되며 영화로 암시된다. 당연히, 거기에는 델 토로의 환상이 어른거리고 있다.
사랑.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사랑에는 언어가 중요치 않다. 농아인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음성 언어를 통해)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수화로 간단한 단어들을 공유하며 눈빛으로 진심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면,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어떠한 장해물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셰이프 오브 워터’가 ‘계란’이라는 소재를 극중으로 끌어들여 물 그리고 사랑과 연결시키는 양상이다. 엘라이자는 계란 모양의 타이머를 맞춰둔 채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자위를 하고, 매일 점심으로 계란을 삶아서 괴생명체와 함께 나누어먹는다.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 옆 금박으로 칠해진 계란이 욕구의 시간을 가늠하는 수단이며, 물 속에서 삶아진 계란이 괴생명체와의 사랑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가 처음 주고받는 수화 단어는 ‘계란’이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뒤에는 삶아지고 있는 계란의 모습이 디졸브되어 등장한다. 염색된 계란은 신약성서에서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고 델 토로의 데뷔작 ‘크로노스’에서, 벌레가 들어있으며 금박을 입힌 계란은 불멸의 삶을 선사하는 기계였다.) 계란은 엘라이자로 하여금 (상징적인 의미의) 성욕과 (실제적인 의미의) 식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관념이 항상 음식과 연관된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엘라이자의 경우 계란이 그랬다면, 그녀의 옆집 이웃인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경우에는 파이가 그랬다. 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매일같이 먹지도 않을 키라임 파이를 주문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서로 다른 사랑은 사실 그 근원에 있어 모두 닮아있고, 이는 곧 물의 속성과 연결된다. 그러나 사랑은 정형화를 전제하는 차별 앞에서 좌절된다. 이 영화 속에서는 관습에 따라 난폭하게 규정되는 것들이 있었고, 이는 어김없이 사랑을 방해한다. 먼저 ‘신’이 그렇다. 시설에 새로 부임한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남미의 원주민들이 이 괴생명체를 신으로 숭배한다고 비웃을 뿐더러 신은 흑인 여성인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보다는 자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넘겨짚어 규정짓는다. 신으로 숭배되던 존재를 격하시킨 뒤 단순한 자산(asset)으로 평가하며 자신들의 기술적 발전을 과시할 실험체로 취급하려는 인간들은 괴생명체를 탄압한다. (스트릭랜드에 의해 고문당하는 괴생명체를 엘라이자가 발견한 순간,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던 계란은 엘라이자의 봉투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그러자 엘라이자의 사랑은 위기에 놓인다.
한편 ‘가족’ 역시 그렇다. 자일스가 매일같이 파이를 사러가던 식당의 주인은, 자일스가 어렵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자 순식간에 정색하며 그의 손을 뿌리친다. 곧이어 찾아온 흑인 손님들에게, 그는 이 곳은 가족 식당이기 때문에 흑인 손님들과 동성애자인 자일스는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 순간 뿌리깊은 관습에 목매인 채 가족이 무엇인지를 제멋대로 규정짓는다. (그의 편협한 규정에 따라 가족을 정의해야 한다면, 그건 오히려 이 영화에서 악역으로 묘사되는 스트릭랜드의 일견 모자람 없어보이는 가족일 것이다.) 그러자 자일스의 사랑은 위기에 놓인다. 모든 것의 다름, 그리고 그들의 닮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이 영화의 사랑은 좌절된다. 그렇다면 누구도 차별받거나 억압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영화 속에 있었다.
영화. 그래서 이제 영화가 등장할 차례다. 엘라이자와 자일스가 살고 있는 건물 1층에는 낡은 영화관이 있다. 자일스는 TV로 매일같이 영화를 틀어놓고 있다. (델 토로 자신 역시 한 명의 영화광으로서 시네마적 레퍼런스를 잔뜩 늘어놓고 있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영화가 영화가 되는 순간은 사랑, 나아가 물과 연관되어 있다. 자일스가 잠든 사이에 집을 탈출한 괴생명체는, 영화관 안에 홀로 서서 영사중인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관에서 괴생명체를 발견한 엘라이자는 그 후 그와 사랑을 나눈다. 이어서 엘라이자와 괴생명체가 욕실에 물을 가득 채워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자, 틈새로 새어나온 물은 아래층의 극장을 적신다. 영화관이 물에 젖은 이후에야 엘라이자는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전에 자일스의 TV에서 흘러나온 적이 있었던 앨리스 페이의 ‘당신은 모를 거야(You’ll Never Know)’라는 사랑의 노래는, 엘라이자가 흑백 뮤지컬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괴생명체와 무대에서 만나는 순간 그녀의 입을 통해 노래된다. 실재하지 않는 영화라는 공간 속에서라야 엘라이자는 노래할 수 있다. 그저 영화관이나 TV에서 되풀이될 뿐이던 숱한 영화들 속에서 대사가 차지하던 자리는, 사랑의 진심을 담은 노래로 황홀하게 채워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물은 사랑과 연결되고, 사랑은 영화와 연결된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물에는 모양이 없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세상 속) 사랑에는 언어가 중요치 않다. (영화 속에서 상영되는 메타적 속성의) 영화에는 진부한 말 대신에 절실한 선율이 실린다. 엘라이자가 괴생명체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직후의 장면에서, 버스의 차창 밖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두 물방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물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규정될 필요도, 억압될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사랑은 마치 정해진 모양이 없는 물과도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재하지 않는 영화 속에서 비로소 절정을 맞이한다.
한편, 이 영화 속 괴생명체에게는 이름이 없다.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는 괴생명체를 사물(thing)로 지칭하는 자일스에게 자신의 수화를 말로 굳이 반복하라 하며 괴생명체를 그(him)로 거듭 지칭하지만, 그녀는 괴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름조차 없는 괴생명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신(Him)’이 된다. 치유 능력이 있으며 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 괴생명체는 남미 원주민들에 의해 신으로 지칭되었으며, 이를 무시하고 부정하던 스트릭랜드에 의해서조차 마지막에는 신으로 다시금 규정된다(“너는 신이군(You are God).”). 이 영화에서는 자일스가 키우는 고양이들 중 두 마리에게 이름이 부여되어 있었다. 토르(Thor)와 판도라(Pandora). 그리고 괴생명체는 그 중 판도라의 머리를 물어뜯어 죽인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신의 이름을 가진 토르를 죽이는 대신 신의 권위에 도전한 판도라를 죽였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괴생명체는, 엘라이자가 가져온 계란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미 ‘부활’했다. 그렇게 영화 속 괴생명체는 상징적인 신으로 치환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틀림으로 치부되는 다름을 모두 동등한 닮음으로 인식하려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으로 여겨지는 괴생명체조차도 (1960년대 초반 미국이라는) 이 영화의 시공간 속에서는 결국 비주류에 속할 뿐이다.
농아 여성인 엘라이자, 동성애자인 자일스, 흑인 여성인 젤다, 러시아 태생의 외국인인 드미트리(마이클 스털버그) 그리고 신으로서의 괴생명체까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 속에서) 소수자인 동시에 주변인에 속하는 이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구조상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당연히 기득권자이자 백인 남성인 스트릭랜드다. (그는 소수자이자 주변인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다섯 인물에게 모두 한 차례 이상 폭력을 가한다.) 결국 괴생명체를 시설에서 몰래 빼내려는 이들의 모습과 이를 막으려는 스트릭랜드의 대립 구도는 부조리한 탄압에 항거하려는 해방자들의 모습, 나아가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연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짜여져 있다.
생각해보면 영화 속에서 괴생명체가 물어뜯은 것은 고양이 판도라의 목덜미만은 아니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괴생명체는 스트릭랜드의 왼쪽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물어뜯는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관습을 반지라는 유형물로 고착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신체의 부위인 왼쪽 약지를 절단함으로써, 그리고 물청소 중에 발견한 그 손가락(그리고 거기에 끼워져 있던 스트릭랜드의 결혼반지)을 엘라이자가 머스타드 소스가 묻은 봉지 안에 담아버림으로써, 이 영화는 정형화된 사회적 관습을 매몰차게 거부하는 괴생명체와 엘라이자의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괴사해서 검게 변해버린 손가락을 자신의 일부로서 포용하기는커녕 자신의 몸으로부터 뜯어내버리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결코 다름과 타협할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차별주의적인 시선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러시아와 미국 양 측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드미트리는 스트릭랜드에게 죽임당하기 직전, 괴생명체를 시설으로부터 빼돌린 이들이 특수 조직원들이 아닌 청소부들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때 청소부들인 엘라이자와 젤다는 이름도, 계급도 없는 자들로 지칭된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적 차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뚜렷히 보이는 스트릭랜드를 궁지로 몰아간 것이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 모두 스트릭랜드와는 확연히 다른 이들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드미트리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스트릭랜드의 패배를 선포한다.
이에 이어지는 다음 순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부둣가에서 스트릭랜드의 총에 맞은 괴생명체와 엘라이자는 정확히 닮은꼴로 겹쳐지며 쓰러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모양이 없는 물처럼 근원적으로는 서로 닮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름이란 곧 틀림이 아니라 닮음이라는 사실을 괴생명체와 엘라이자의 동일한 움직임을 보여줌으로써 다시금 시각적으로 역설한 뒤에야, 빗속에서 엘라이자를 안아든 괴생명체는 그대로 물으로 뛰어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는 물로 가득찬 심연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다. 이때 엘라이자의 목에 난 상처는 모양 그대로 아가미가 되어 (‘신’을 사랑한) 그녀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마치 전설 속에서처럼 (구두를 벗고) 인어가 된 엘라이자는, 태생부터 어인이었던 괴생명체와 함께 그들의 근원이자 그들의 사랑을 재단할 어떤 훼방도 없을 물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자일스의 나레이션처럼, 엘라이자를 떠올릴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 질문이 끝나자, 나직이 사랑의 시가 읊조려진다.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For You are everywhere)’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시 속에서, 결국 그대(You)는 물(water)이었다. 정해지지 않은 모양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대는 물이 되고, 물은 사랑이 된다. 사랑은 영화가 되고, 영화는 환상이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환상은 그렇게 완성된다. 물 속에서, 사랑을 담아, 영화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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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2017)
dir. 기예르모 델 토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