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BEST 12

2024년 가장 훌륭했던 작품 열 두 편

by Leo

올해도 마찬가지로, 2024년 한 해 동안 보았던 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12편에 대해 짧게나마 써보려 합니다. 여느 해와 같이 어떤 경로로든 신규 공개된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선정해 보았습니다. 올해 공개된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작품들 중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와 '수유천,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 등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이 있어서 아쉽네요. 돌이켜보니 올해도 참 좋은 영화가 많았습니다. 그럼 12위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12위, <나의 선생님> (파라 나불시,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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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 나불시의 장편 데뷔작 ‘나의 선생님’은 막막한 상황 속에서 두 역할 사이의 딜레마에 놓인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서의 자신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저항군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분투하는 바셈(살레 바크리)은, 그 두 역할이 충돌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 깊은 고뇌에 빠진다. 얼핏 전혀 다른 선상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역할의 본질이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과 함께, 위태롭고 급변하는 일상 속에서 한 인물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확고하게 전달하는 강렬한 사회고발극. (The Teacher / الأستاذ)



11위, <리틀 브라더> (쉐리단 오도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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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는 정석적인 로드무비의 틀 속에 담긴 진중한 각본과 대사를 통해 형제 간의 파토스를 곡진하게 드러낸다. 머물던 병동에서 의도치 않게 나오게 된 피트(필립 에팅거)와 엉겁결에 동행하게 되는 동생 제이크(다니엘 디머)의 여정을 다루는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의미로 1인분의 삶을 쉬이 책임질 수 없었던 형제 사이의 진솔한 대화로 깊은 감정의 골을 파고든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형제가 결국 무엇을 공유해왔는지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조각들은, 두 명의 주인공을 모두 지칭할 수 있는 ‘Little Brother’라는 중의적인 제목을 통해 극의 주제를 훌륭하게 환기한다. (Little Brother)



10위, <사막의 두 남자> (파우지 벤사이디,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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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찬 코미디와 처연한 드라마가 공존하는 이상한 버디무비. 채무자의 빚을 받아내기 위해 길 위에 오른 두 남자의 여로에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드라마는, 때로는 실없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결국에 사회적 안전망의 변두리에 놓인 인물들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황량한 사막의 풍경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끊임없이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와중에, 불협화음에 가까운 이 영화의 사건들이 제멋대로 뒤얽힌 끝에 ‘사막의 두 남자’는 비극을 어떻게 희극으로 승화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기묘한 대답을 던진다. (Deserts / Déserts)



9위, <영혼의 포식자> (알렉상드르 뷔스티요/줄리앙 모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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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강렬한 호러영화를 만들어 온 알렉상드르 뷔스티요와 줄리앙 모리 감독 콤비는, ‘영혼의 포식자’에서 그들 특유의 호러적 터치에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더해 극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간다. 극 전반에 걸쳐 관련이 없어보였던 사건들을 뜻밖의 지점에서 연결하고, 적재적소에 깔아두었던 소재들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소화한다. 호러 혹은 미스터리 장르에서 수없이 다루어졌던 클리셰가 곳곳에서 눈에 띄지만, 이를 짜깁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포식자’는 호러물과 추리물의 관습을 과용한 채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가 아닐까. (The Soul Eater / Le Mangeur D’âmes)



8위, <야닉> (캥탱 뒤피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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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탱 뒤피유의 영화세계는 코미디와 초현실의 앙상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야닉’은 거기에 극중극이라는 다층적인 관점을 더한다.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과 그 연극을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객석에서 끊임없이 딴지를 걸며 난입하는 야닉(라파엘 케나르)의 상황이 얽고 얽히는 이 영화 속에서, 캥탱 뒤피유는 연극과 현실의 모호한 (그 자체가 의도적으로 설정된) 경계를 겹겹이 쌓아올린 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클라이막스를 통해 기가 막히게 해체한다. 무대와 객석 사이, 그 벽을 손쉽게 허물고 그 틈을 세심히 메우는 뛰어난 소동극. (Yannick)



7위, <찬란한 내일로> (난니 모레티,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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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자 배우로서 다방면에서 활약해 온 난니 모레티의 사념이 담긴 신작 ’찬란한 내일로’는 그의 길고 촘촘한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수작을 더한다. 촬영 중인 영화를 끝마치기 위해 분투하는 (그러나 타협하고 싶지 않은) 감독으로서의 조반니(난니 모레티)와 가족 내부의 균열을 애써 메우려 (혹은 때때로 외면하려) 고심하는 조반니의 허심탄회한 고백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극 후반부의 행진 장면을 통해 역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까 인생이란 이 모든 명과 암의 순간들이 모여 내일로 향하는 길일 뿐이라고. (A Brighter Tomorrow / Il Sol Dell’avvenire)



6위,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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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만큼 가족영화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감독은 흔치 않을 것이다. 아쉬움이 더 컸던 전작 ‘브로커’ 이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만든 신작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드라마야말로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한다. 세 가지의 시선(그리고 세 인물의 관점)이 평행적으로 제시되는 이 영화는, 의도와 상관없이 뒤엉켜버린 오해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결말부에 이르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말한다. 결국 평행하게 달리던 시선이 마침내 굴절되어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작은 희망이 있었다고. (Monster / 怪物)



5위, <아노라> (션 베이커,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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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의미에서 션 베이커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차갑게 현실을 후벼파는 블랙코미디인 동시에, 소외된 인물들에 대한 따스한 연민이 공존하는 ‘아노라’에는 션 베이커의 영화세계가 그대로 녹아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민자 그리고 성노동자라는 두 층위의 인물들을 함께 아우르는 ‘아노라’는, 좌충우돌 소동극으로 시작해 기묘한 로드무비를 거쳐 두 인물을 오래토록 가만히 응시하는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션 베이커에게 있어서 연대란 곧 응시였고, 차가움과 따스함이 함께 감도는 ‘아노라’의 엔딩이야말로 이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Anora)



4위, <키메라> (알리체 로르바케르,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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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동화같은 이야기 속에 처연한 현실을 마술을 부려 녹여낸다는 점에서, ‘키메라’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임이 확실하다. 이방인이자 도굴꾼인 아서(조쉬 오코너)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로 돌아오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아서의 과거에 붙박인 한 인물이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에 순응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떠올려보면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는 언제나 현실보다는 동화에 가까웠다. 붉은 실이라는 소재를 통해 아름답게 조응하는 ‘키메라’의 오프닝과 엔딩은, 결국 처연한 현실 속에서 놓여있는 파리한 기적에 대한 동화적인 믿음이다. (La Chimera)



3위,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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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하고 상징적인 실험드라마.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인 비극을 주제로 삼고서도 그 비극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의도적으로 사건의 주변부만을 보여줌으로써 그 끔찍함을 배가한다. 평범하게 전시된 가족의 이면에 놓여있는 것은 끔찍하게 은닉된 역사의 참상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려 애쓰는 인물의 이면에 놓여있는 것은 억지로도 게워낼 수 없었던 토악질이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사운드이고, 색채가 아니라 온도이다.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들려오는 것과 느껴지는 것들의 잔혹함. (The Zone of Interest)



2위,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앤드류 헤이그,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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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아쉬웠던 ‘린 온 피트’ 이후 앤드류 헤이그가 7년 만에 만든 신작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역시 훌륭했던 ‘주말’ 혹은 ‘45년 후’를 넘어선, 그의 필모그래피 최고작으로 보인다. 극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외로움의 정서는 새롭게 다가오는 연모의 감정과 해묵어 잊혀졌던 가족의 기억을 통해 역설적으로 환기되는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아담(앤드류 스콧)을 포함한 모든 인물이 마치 유령과도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오래토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엔딩을 통해 이 영화는 읊조린다. 그 외로운 유령(들)은 어떻게 어둠을 헤치고 서로를 만나 별빛이 되었나. (All of Us Strangers)



1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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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데뷔 이후 단 세 편의 장편영화만을 만든 빅토르 에리세가 ‘햇빛 속의 모과나무’ 이후 31년 만에 만든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깊은 소회가 배어있는 걸작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세계에서 되풀이되는 향수 그리고 상실의 정서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끝맺지 못한 한 편의 영화와 홀연히 자취를 감춘 한 배우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그의 이전 세 작품을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그리고 그의 작품 사이의 길고 긴 공백을 의도적으로 극에 녹여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인간 그리고 영화의 기적을 믿는다. 잊혀져도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비가, 그리고 사라져도 잊혀지지 않을 것들에 대한 찬가. (Close Your Eyes / Cerrar Los Ojos)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엄청난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한 개봉만 해서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상영관이 편도로 4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이 영화만을 보러 8시간을 운전한 게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요). 한국에서도 작년 말에 개봉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만약 이 영화가 좋으셨던 분이라면 1973년작 '벌집의 정령', 1982년작 '남쪽' 그리고 1992년작 '햇빛 속의 모과나무'도 꼭 접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포함해서 네 편 모두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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