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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05. 2018

그 여름의 사랑을 영사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름.


우리는 왜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까. 이름이라는 음성적인 기표(signifiant)가 존재라는 실존적인 기의(signifié)를 환기해 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시의 한 구절처럼,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관념으로서의 존재가 세상에 현현할 수 있기 때문일까.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그러면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영화 속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올리버(아미 해머)는 서로의 이름을 반대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서로의 진정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수동적으로 결합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습적인 관계를 능동적으로 뒤섞음으로써 이미 규정된 세상의 질서에 조용하게 항거한다. ‘이름’이라는 고유한 언어적 표현에 부여된 본질적인 자의성을 거스를 때 그들은 서로를 자신의 세상 속으로 끌어당기고, 나아가 함께 하나의 세상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사진으로 남겨진 옛날 조각상들을 마치 슬라이드를 넘기듯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쇼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과거의 유물들은 그 자체로 박제된 기억을 정확히 은유한다. 그렇게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행위를 통해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어 남을 어떤 사랑을 휘감아 영사(映射)하려 한다.



엘리오.


이 영화는 누구의 기억일까. 당연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엘리오의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의 군데군데 편광 효과를 삽입하거나 필름 자국을 의도적으로 남겨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삶에 평생동안 반복적으로 투사될 사랑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이기도 하다. (올리버를 기다리는 엘리오를 비추는 장면, 그리고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 속에서 올리버를 바라보는 엘리오의 시점 쇼트. 이 두 장면에는 필름 자국이 겹쳐져 있었다.) 극중 누군가는 영화를 ‘필터’라 칭한다.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난 엘리오와 올리버의 감정적 고조가 절정에 달하던 순간, 엘리오는 주황색 필터를 덧입힌 것만 같은 기이한 꿈을 꾼다.) 현재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이야기 자체에는 필름의 간접성을 시각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엘리오가 경험하는 황홀한 사랑의 기억을 마음 깊숙한 곳까지 주저없이 밀어넣는다.


부족함 없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엘리오는 영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엘리오는 자신의 혈통을 두고 유대인이자 미국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할 뿐더러, 올리버에게 ‘아까 그 연주’가 좋다는 말을 듣고서도 자꾸 다른 편곡을 들려주며 논점에서 우회하려 한다. 그리고 그건 성정체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리오는 영화 속에서 질문에 답할 때마다 곧잘 다른 언어로 대답하곤 하는데, 이러한 의사소통의 수단적 불일치야말로 그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주저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엘리오는 엄마가 이탈리아어로 질문해오자 프랑스어로 답하며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오는 여자친구에게는 영어로 답하며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세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엘리오가 하나의 언어로만 오롯이 소통하는 것은 올리버와 대화할 때 뿐이었다. 그건 바로 올리버의 언어인 영어였다. 올리버를 사랑하게 된 엘리오는, 그래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올리버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확립해간다.



한편, ‘안다는 것’이 곧 자신감이라고 믿는 엘리오는, 그렇기 때문에 올리버에게 느끼던 미묘한 감정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엘리오가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집 앞에 막 도착한 올리버는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사진은 자기 모습을 다 담지 못한다는 실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오는 ‘살구(apricot)’의 어원에 대해서 막힘없이 설명하는 올리버를 보게 된다. (올리버의 장광설이 끝난 직후, 카메라는 그 장광설의 대상인 아버지 뿐 아니라 엘리오를 함께 담는다.) 그러니까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올리버의 자신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동경인지 사랑인지, 엘리오는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오후, 엘리오의 엄마는 공주와 기사 이야기를 엘리오와 남편에게 읽어준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어로 쓰여진 글을 독일어로 옮긴 것이었으며, 엄마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회술된다. (모호한 언어적 정체성을 가졌을 뿐더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엘리오와 올리버의 기묘한 관계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되는 것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에 대해 엘리오가 갖고 있던 소심한 태도를 올리버가 정반대로 바꾸어버린 직후였다. 정체성이 모호한 언어로 회술된 공주와 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엘리오와 올리버는 이야기에 남겨진 질문들을 주고받다가 시내로 향한다. 그리고 시내에서 올리버가 2차 세계대전의 기념물이라고 생각했던 조형물을 엘리오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것이라고 지적하자,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세상에 네가 모르는 게 있기는 하냐고 장난스레 되묻는다. 그러자 엘리오의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올리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엘리오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정반대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안다는 것’을 자신감으로 치환하는 엘리오의 세상 속에서 엘리오는 그 순간 올리버에게 느끼는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 당위성, 즉 자신감을 갖게 된다. ‘알아줬으면 해서(Cause I wanted you to know)’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던 엘리오는, 그 순간 올리버에게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고백한다.



그러자 엘리오의 정체성은 다양한 층위에서 확립된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하게 된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신하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하며, 올리버가 첫 식사 자리에서부터 계속 목에 걸고 있던 유대교 표식의 금목걸이와 동일한 금목걸이를 차기 시작한다. 그렇게 엘리오와 올리버는 자신들만의 오롯한 세상을 만들어간다. (엘리오는, 이전에 올리버에게 이 마을에서 아마 우리가 유일한 유대인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성장영화처럼 짜여져 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전반부는, 관능적인 감정이 시종 일렁거리는 후반부의 멜로영화로 탈바꿈한다.



올리버.


이 영화에서 엘리오의 기억을 구성하는 건 누구일까. 당연히, 그건 엘리오에 대한 마음을 섣불리 밝히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던 올리버였다. 이와 동시에, 엘리오에게 있어 올리버는 엘리오를 규정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엘리오 주위의 성품 좋아보이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막상 엘리오에 대해 ‘다정하다(kind)’고 진솔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올리버 뿐이었다. (이 장면 역시, 올리버가 ‘모르겠다’고 평가했던 자신의 글을 엘리오가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해주던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측면에서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가 최초로 역전되던 장면이기도 했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어떤 연주를 할 때 가장 좋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는 자꾸 다른 편곡의 연주를 들려주는 엘리오를 두고 방을 나가는 척 함으로써, 엘리오가 특정한 곡을 연주할 것을 간접적으로 어필한다.)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자신과 만날 시간을 자정으로 특정하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되풀이되는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는 제안 역시 먼저 꺼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리버는 엘리오의 불분명했던 정체성을 깨닫게 해 주는 인물이었다. 살구의 기원을 정확히 읊는 올리버와 자신의 기원을 뭉뚱그려서 말할 수밖에 없는 엘리오는, 극 초반부에는 대조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닮아가는 양상을 보인다. 자신의 혈통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금목걸이 역시 같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올리버와 엘리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의 장면들은 관계의 측면에서 세심하고 정확하게 쌓아올려져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소위 ‘욕망 3부작’은, 사실 그 화법은 다소 다를지언정 모두 그렇다.) 그렇게 차곡차곡 포개진 지층과도 같은 쇼트들은 마음에 지진을 일으키는 것만 같은데, 이들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그리고 관객들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려는 순간마다 그 진앙(震央)을 봉인하려는 듯 카메라 패닝을 더해서 쇼트를 끝맺거나 전혀 다른 종류의 컷-어웨이 쇼트를 이어붙여서 역설적으로 마치 여진(餘震)과도 같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반바지와 셔츠, 살구 혹은 맨발에 이르기까지, 소재를 사용해서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내지는 ‘살구’처럼 상징적으로까지) 상대방의 존재를 감각화하려는 야릇한 순간들에서는 영화 속에 관능을 녹여내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탁월한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도 하다.



다시, 엘리오.


엘리오는 함께 떠났던 짧은 여행이 끝난 뒤 올리버가 기차를 타고 떠나자,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 결국 열일곱 엘리오의 마음을 강진으로 뒤흔들었던 그 해 여름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도 여진이 남는다. 엘리오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던, 올리버를 엘리오라 부를 수 있었던, 짧지만 강렬하게 반짝였던 그 여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오롯이 엘리오의 기억, 엘리오의 여름이었다. 이건 첫사랑이라는 아련한 기억을, 혹은 소수의 사랑이라는 애틋한 기억을, 어쩌면 이 모두를 무화(無化)시킬 수도 있는 위력을 지닌 사랑이라는 강렬한 기억 그 자체를 황홀하게 담아내려는 영사기 속의 마법이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처음 시내로 함께 나갔던 날,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여름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올리버는, 겨울이 되면 다시 여름을 그리워할 거냐고 엘리오에게 되물었다. 엘리오는 그 질문에 당시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계절이 바뀌어 눈 내리는 겨울이 되고, 엘리오는 올리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올리버는 통화 중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전화를 끊은 뒤, 엘리오가 불길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 의자에 우두커니 몸을 기대어 얼어붙자 영화는 그대로 끝난다. 왜 벽난로 앞이었을까. 엘리오에게 (영사되던 영화와 같은) 기억으로만 남아버린 그 해 여름을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열기를 통해 피부로 그 계절을 느끼는 것이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느끼며 태양이 작열하던 그 여름을 다시 되살려내기라도 하려는 듯 벽난로 안을 응시하는 엘리오를 역쇼트로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엘리오의 모습을 응시한다. 겨울이 되면 다시 여름을 그리워할 것인가. 엘리오는 여름 당시에는 답하지 못했던 올리버의 질문에 대해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엔딩으로 말없이 대답한다. 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너와의 여름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이라고.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지나가고 난 뒤 여전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오를 부르는 배경 속 엄마의 목소리다. ‘엘리오(Elio)’라고, 그녀는 이름을 부른다. 모두가 존재하는 (현재, 그리고 겨울이라는) 세상에서, ‘엘리오’는 엘리오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엘리오와 올리버의 (과거, 그리고 여름이라는) 세상에서, ‘엘리오’는 올리버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불리는 ‘엘리오’는 엘리오이기도, 올리버이기도 하다. 화자인 엄마는 ‘엘리오’를 말함으로써 엘리오를 부르지만, 청자인 엘리오는 ‘엘리오’를 들음으로써 올리버를 되새긴다. 그 외마디 이름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순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너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하나의 단어 속에 융화시킨 채 그 해 여름의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영사를 처연히 끝마친다. 그러나 기억 속에 박제된 ‘그 여름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화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영사될 것이다. 아마, 엘리오의 삶 속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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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dir. 루카 구아다니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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